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을까요
- 앞으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그 자리에 거꾸러지든지
S#1
결국 올가미에 걸리고 만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달째 밀린 방세와 아직도 결제하지 못한 지난달 카드 대금 때문이었습니다. 한 건당 20만 원을 준다는 고액 알바란 이야기에 혹했죠.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해 넘겨주면 되는 일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보이스 피싱이란 걸 알았지만 그 유혹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아니든가요. 하루 일곱 번 인출했고, 백사십만 원이 수입이 생겼습니다.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하겠죠. 또 보이스 피싱을 당하는 건 정신을 놓고 사는 멍청한 자들이 치러야 대가라고 합리화시켰습니다. 돈이 생기자 라면을 끓이는 데 흥이 났습니다. 희망이 보였으니까요. 딱 한 달만 하자고 독하게 마음먹고, 젓가락으로 라면발을 막 들어 올릴 때 집에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더 이상 설명할 게 없죠. 아, 그건 몸소 깨닫고 있습니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자신의 눈에서는 피 눈물 나게 된다는 거요.
S#2
클럽에서 그녀를 만나 모텔에서 뜨거운 원나잇을 했습니다. 욕구가 마그마처럼 솟구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궁극의 답은 침대 위에 있습니다. 몸의 언어가 주는 쾌락과 해방감.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게 되는 순간은 천국입니다. 신체의 특정 부위가 왕성하게 수축하는 육체적 오르가즘과 아타락시아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정신적 오르가즘의 이중주가 열락의 신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몸에 남아 있는 쾌락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다른 대상을 찾아 사냥꾼처럼 헤매죠. 그러는 중 그녀에게서 카톡 문자를 받았습니다.
- 나 임신했어. 결혼해 달라는 게 아냐. 병원비 3백만 원만 보내줘. 그렇지 않으면 네 부모님한테 찾아갈 거니까. 빨리 보내!
통속극처럼 뻔한 거지만 내 결백을 주장하려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리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소중이를 거세시켜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죠. 똥을 밟은 겁니다. 아니면 비싼 수업료를 낸 거죠.
향기와 똥내는 서로 다른 게 아니라 일란성쌍둥이입니다.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거죠. 욕망이 상승 과정에 있으면 향기가 되고, 그것이 하강하여 추락하게 되면 똥내가 됩니다. 향기든 똥내든 내 몸 안에 있었던 거고요.
S#3
편의점 알바, 택배 기사, 중국집 주방 보조, 제약회사 신약 테스트 알바, 패밀리식당 발레파킹 알바, 생활용품 다단계, 아파트 건설현장 잡역부 등등. 서른이 되기도 전에 열두 개가 넘는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아직도 고시원 인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네요. 가끔 교회에 새벽기도도 나가고, 헌금도 하지만 내 인생을 밝은 빛으로 인도해주는 비상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는 퇴직금으로 50억이나 받았다고 하던데. 내 통장의 잔고는 5천 원이 고작입니다. 그런데 시골에 있는 부모님께서 무릎 수술을 받았다고 하는데 병원비는커녕 연탄 백장 사드릴 돈도 없네요. 겨울 추위가 성큼 다가왔는데 내 코가 석자이니.
- 아, 씨발. 제발 누가 나 좀 죽여줘라.
그때 문자 메시지가 떴습니다.
[Web발신] 10/22 [신협] 한구라님 계좌에서 우리은행 노란하마 님에게 6,000,000 이체.
이 년 전에 친구가 하는 이자카야에서 3개월을 일하고 못 받은 월급이었습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웬일로 이런 돈벼락이. 전화도 받았습니다. 돼지갈비 식당을 열었는데 와서 일 좀 도와 달라네요. 생각해 보겠다고 했죠. 얼씨구 좋구나 하고 곧바로 허락하면 궁하게 보일 것 같아서요. 그 친구도 내가 밑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알고 있지만 그걸 까놓고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 씨발. 제발 누가 나 좀 죽여줘요...는 취소할게요. 살아봐야죠. 시골의 부모님한테 연탄 값도 좀 보내드리고요.
S#4
되는 게 없습니다. 한 개도, 코딱지만큼도 없네요. 신춘문예 계절이 돌아오는데 마음만 조급할 뿐 써놓은 글은 보이지 않네요. 여덟 번의 낙선. 계속 떨어지다 보니까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정신 공학적으로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으니까요.
- 느들의 허위와 가식에 찬 세속적인 눈으로 나의 고매한 글이 보이랴!
다음의 브런치 작가 지원을 네 번이나 했는데 그것마저도 다 떨어졌네요.
- 아, 이건 누군가 나를 음해하고 있는 게 분명해. 아니면 대학 나오지 않았다는 게 원인일까. 야, 먹물들아. 셰익스피어도 대학 안 나왔어!
유튜브에 웹 소설을 업로드했습니다. 선정성과 폭력성이 싹 걸러내고 고고한 인생의 멋과 뼈에 사무칠만한 철학을 담은 스토리입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편씩 올렸지만 이젠 띄엄띄엄 한 달에 한 편 올리는 것마저 쉽지 않네요. 개그맨들의 콘텐츠는 구독자가 오륙십 만 명을 넘어 백만이 넘은 것도 허다한데 내가 개설한 웹 소설은 구독자가 겨우 네 명입니다. 여섯 달이 넘었는데도요.
아무래도 내가 쓰는 스토리의 앵글이 오십 년쯤 뒤에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당대에서는 무시받을 수밖에요.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것도 천재가 받아야 할 형벌입니다.
- 깊은 철학을 가지고 쓴 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동시대의 야만스런 독서 행태는 분명히 질병입니다. 그걸 탓할 순 없죠. 병이고 환자니까요. 당연히 작가가 인내심을 가지고 돌봐줘야 합니다. 자비라는 건 이런 때 필요한 거니까요.
작가는 독자들과 주파수를 맞추어 가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전파라고 해도 사이클이 어긋나면 어긋나기 마련이니까요...라고 위로해 보지만 씁쓸합니다.
S#5
내 체중은 음, 하여튼 많이 무겁습니다. 뛰는 거 졸라 취미 없습니다. 아니, 걷기도 힘든 데 뛰는 거라뇨? 미친 거죠. 나도 압니다. 남들이 나를 볼 때 몬스터처럼 본다는 거요. 근데 그거 폭력입니다. 몰지각한 다수의 횡포입니다. 묵시적으로 표준형의 인간 체형을 만들어놓고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하면 인간실격으로 보는 건 문명사회의 야만인 거죠. 기계적이고, 획일적으로 만들어진 로봇과 뭐가 다릅니까!
아주 마른 사람, 마른 사람, 마르지도 않고 살찌지도 않은 사람, 조금 살찐 사람, 아주 많이 뚱뚱한 사람. 그것은 다 제 각각 개성인 겁니다. 자신의 몸의 생김새에 따라 행복의 몫이 달라지는 건 부조리한 차별인 거죠. 내 몸이 어떻든 그 몸의 생김새와 상관없이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게 사람 사는 사회이고요.
~라고 말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야식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와서도 밤늦게까지 오랫동안 걷기 운동을 했습니다. 두 달이 조금 지나자 체중이 감소하는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가벼워지고, 유연한 느낌마저 듭니다. 뉴런이 활성화 되는지 머리 회전도 빨라졌고요.
조각가는 나무나 바위에 모양을 새기는 게 아니라 그 원래 재료가 가지고 있는 걸 드러내 주는 거라고 하죠.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걸 방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드러내는 사람도 있죠.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답게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몸이든 정신이든 사람다움을 가지려면 중력을 거스르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돼지가 되는 건 너무 쉽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됩니다.
오늘부터 아니 당장 지금부터 사람처럼 사는 연습을 해보는 거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