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학에서 어떤 교수가 흥미 있는 통계를 낸 적이 있습니다. 남자가 섹스를 하고 난 뒤에 하는 행동 패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섹스를 한 뒤 침대에서 다리를 쭉 뻗고 담배를 한 대 피운다. 18% 가까운 수치를 보였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 마신다. 7% 정도가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화장실로 가서 쉬를 한다. 3%가 작은 볼 일을 본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70%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집-에-간-다!
영화 <5 to 7>은 속되게 표현하면 섹스를 하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게 미사리 카페촌의 값싼 퇴폐적 분위기가 아니라 뭔가 사람을 홀리는 지적 감수성과 세련된 관능미가 물씬 묻어납니다. 우선 캐스팅부터 그렇습니다. 안톤 옐친이 스물네 살의 뉴요커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브라이언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선한 눈빛과 아직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얼굴로 등장합니다. 서른세 살의 파리지엔느면서 완숙미를 보여주는 여주인 아리엘은 베레니스 말로이가 맡았습니다. <007 스카이폴>에서 본드걸로 출연한 베레니스 말로이. 그녀의 머리 위에 놓인 술잔을 맞추는 게임에서 제임스 본드는 주저하지만 단 한 번에 쓰러뜨리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서늘한 연기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작가 지망생인 브라이언과 파리에서 뉴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리엘은 아주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건 우연입니다. 하지만 극적 흥미를 유발하려면 그런 우연에 트릭을 쓰는 게 중요합니다. 거리감을 유지한다든가 보조적인 소도구를 통해 우연을 필연으로 바꿔놓는 거죠. 옐친은 오직 글을 쓰는데 전력투구하느라 친구도 없고, 더군다나 여친은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운명처럼 뉴욕 거리를 걷는 옐친의 시선이 앞가슴을 살짝 드러낸 검은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피우는 아리엘에게 꽂히는 것으로 만남이 시작됩니다.
둘의 만남에서 담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통속적인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로맨스의 아우라를 불어넣기에 충분하죠. 무엇보다 아리엘은 담배를 한 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여신이 되었으니까요. 옐친이 아리엘에게 다가가 건넨 첫 대사.
“we are exile, the smokers.”
담배 하나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삶이 될 수 있다는 걸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진 남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담배는 영혼이 숨 쉬는 거니까요.
두 번째 만남에서도 둘은 담배를 손에 들고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담배는 구겐 하임 미술관, 센트럴 파크, 유서 깊은 서점과 유명 와인 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늘 오후 5시에서 7시까지였습니다. 프랑스에선 배우자가 있어도 오후 5시에서 7시까지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하죠. 아마 배우자들한테 부여한 숨구멍 같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개 불륜 로맨스의 핵심은 침대의 스프링 강도를 테스트하거나 생생한 육체를 통해 삶의 진실을 찾아보겠다고 특정 부위를 지나치게 많이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불륜 로맨스를 볼 때 관객은 부러움과 경멸의 이중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5 to 7>은 불륜 로맨스임에도 불구하고 지적 감수성과 매혹적인 분위기 때문에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만큼 섬세한 연출로 잘 포장이 됐다는 의미도 되겠죠.
어쨌든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서 열띤 논쟁을 하고, 맥주와 와인을 마시면서 미국문화와 프랑스 문화의 차이를 논하고, 결혼과 인간관계에 대한 대사들에서 느껴지는 철학과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배경과 사운드가 스크린에 잘 녹아들어 리얼리티를 감득하게 합니다.
5시에서 7시까지의 두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만 7시가 넘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기에 서글픈 시간입니다. 결국 옐친은 아리엘한테 함께 인생을 하자고 프러포즈를 하고, 약속을 받아내죠.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옐친이 아리엘과 새 출발하기로 약속한 호텔로 갔지만 아리엘은 보이지 않고 도어맨이 건네준 봉투 속에서 자신이 준 반지를 되돌려 받고, 그것을 다시 아리엘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며 돌아서고, 작가로서 출판을 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민 뒤 우연히 미술관에서 아리엘 가족과 만나 그녀의 손가락에 끼어있는 그 반지를 보는 장면은 진한 페이소스를 자아냅니다. 사랑마저도 세속적 소유에 기준을 두는 이들은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사랑은 옆에 두지 않고서도 가능합니다. 분명히.
모든 선택에는 배제가 따릅니다. 결혼을 하는 건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걸 약속하는 거죠. 그런데 가끔 현실은 그런 도덕률을 배반합니다. 그건 인간의 감정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성이 옳다고 해도 때로는 감정이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불륜 로맨스는 일종의 그런 감정이 인화된 판타지입니다. 그걸 잘 녹여내어 연출해낸 게 <5 to 7>입니다. 적어도 바람피우는 년놈들은 저질이고 천박하다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심리적인 알리바이로 내세울 만한 불륜 로맨스의 교과서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어떤 남자도 검은 드레스에 담배를 든 베레니스 말로이 같은 여자를 거리에서 본다면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겠죠.
그런 여자가 먼저 다가온다면?
오, 주여.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5 to 7>은 사랑을 가슴에 묻어두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애틋한 스토리입니다. 미련과 아쉬움, 그리고 기쁨과 아픔이 함께였기에 오랫동안 사랑으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정서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도 적지 않습니다. 아리엘이 유부녀라는 걸 알고 옐친의 아버지는 충격을 받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행복을 주는 여자라면서 그녀를 오히려 사랑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어머니 역은 글렌 클로즈가 맡았습니다. 윤여정 씨가 아카데미 여주조연상을 받을 때 글렌 클로즈가 수상하기를 바랐다고 말한 그 배우죠. 아리엘 남편과 여비서의 관계도 좀 이해하기 난해했습니다. 센트럴 파크의 벤치에 쓰여 있는 문구들은 정말 좋았습니다. 억지 부리지 않는 작은 것들로 만드는 문화의 힘이죠. 그래서인지 센트럴 파크나 구겐하임 미술관, 크로포드 도일 서점, 쉐리 르만 와인샵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마저 생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