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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Oct 31. 2021

연애편지

- 운영이 김진사에게 보내는 연서

  고전소설 <운영전>은 양반 김진사와 궁녀 운영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고전소설이 천편일률적으로 해피엔딩인데 반해서 <운영전>은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운영이 자결을 하자 김진사도 이에 따라 죽음을 택하는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됩니다. 소설 중에 운영이 김진사에게 보내는 연서 내용을 보면 짠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의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런 편지를 썼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릿해집니다.             



  한번 눈으로 인연을 맺은 후부터 마음은 들떠 있고 넋이 나간 채 능히 마음을 진정치 못하고 늘 그대가 있는 쪽을 향해 바라보며 애를 태웠지요. 이전에 벽 사이로 전해 주신 편지로 해서 잊을 수 없는 옥음을 황송하게 받아 들고 펴기를 다하지 못하여 가슴이 메고 읽기를 반도 못하여 눈물이 떨어져 글자를 적시기에 능히 다 보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찌하오리까. 이러한 후부터 누워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은 목을 내려가지 않으며, 병은 골수에 사무쳐 온갖 약이 효험이 없으니 저승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직 소원은 조용히 죽음을 따를 뿐이오니,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신께서 도와주셔 혹 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이 원을 풀게 하여 주신다면 마땅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서라도 천지신명의 영전에 제를 올리겠습니다. 다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예를 갖추지 못하고 삼가 붓을 놓나이다.    


      

  일전 무녀가 전해 준 편지에는 낭랑한 옥음이 종이에 가득하였습니다. 정중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어보니 슬프고도 기뻐서 마음을 스스로 진정하지 못하고 바로 답서를 보내고자 하였사오나 이미 전할 길이 없었습니다. 또한 비밀이 샐까 두려워서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날아가고자 하오나, 날개가 없으니 애가 끊어지고 넋이 사라져 다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죽기 전에 이 편지를 통하여 평생의 한을 다 말씀드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낭군께서는 저를 새겨 두옵소서. 저의 고향은 남쪽이옵니다. 부모님이 저를 사랑하시기를 여러 자녀 가운데에서도 편벽되게 사랑하시어, 나가 놀아도 저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두셨습니다. 부모님은 삼강오륜을 가르치시고 또한 칠언 당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이 열세 살 때 대군의 부르심을 받은 까닭으로 부모님을 이별하고 형제를 멀리하여 궁중에 들어오니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빨래하러 가는 행차에는 양금의 시녀들이 다 모였던 까닭으로 여기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사옵니다. 눈물은 먹물로 변하고 넋은 비단 실에 맺혔사오니 바라고 원하옵건대 낭군님께서는 한번 보아주옵소서.    

 


  박명한 운영은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사뢰옵니다. 제가 비박한 자질로서 불행하게도 낭군님께옵서 유념하여 주시어 서로 생각하기를 몇 날이며, 서로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하다가 다행히 하룻밤의 즐거움을 나누었을 뿐, 바다같이 크고 넓은 정은 다하지 못하였나이다. 인간사 좋은 일에는 조물주의 시기함이 많사와, 궁인이 알고 대군이 의심하시어 조석으로 화가 다가왔으매, 낭군께서는 작별한 후로 저를 가슴에 품어 두시고 상심치 마시옵소서. 힘써 공부하시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후세에 이름을 날리시어 부모님을 기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 의복과 보화는 모두 팔아서 부처님께 바치시어 여러 가지로 기도하시고 정성을 다하여 소원을 내어 삼생의 미진한 연분을 후세에 다시 잇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력투구하지 않은 사랑은 추억이 아니며 멍청한 경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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