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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Nov 12. 2021

사사(師事)하다와 사숙(私淑)하다

- 예비 작가님들께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추천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일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도 없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 가운데 멘토(mentor)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면서 자신이 없는 동안 아들 테리마커스를 케어해 줄 것을 지인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와 보니 아들은 올바로 반듯하게 잘 성장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성장하도록 케어해 준 지인의 이름이 바로 멘토였던 거죠. 그 멘토란 이름이 일반명사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흔히 쓰는 한자어로는 ‘사사(師事)하다’와 ‘사숙(私淑)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사하다’는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사숙하다’는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본받아서 그를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문청 시절에 운이 좋게 이청준 선생님께 문학뿐만 아니라 인생사는 지혜를 사사했습니다. 제가 못나서 그 가르침을 온전하게 다 따르지 못하고 산 게 부끄럽지만 그런 기회를 누린 건 정말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죠. 어쨌든 헤매고, 비틀거리다가 늦었지만 이제라도 중심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 중입니다. 잘 살지는 못했더라도 제대로 죽어보자는 마음이지요. 오늘 하루도 묵직한 발걸음으로 결승선에 조금 가깝게 다가갔습니다. 미련과 후회의 한숨보다 허망한 짐을 덜어내고 있는 중이라 걸음은 가벼워졌습니다.



  즐거운 행운을 하나 더 만난 건 귀가 순해진 세월을 살아서 일까요, 고목에 꽃이 핀 것처럼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열혈 사숙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는 순간, 좌절했고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쓸 수 있는 극한에 치달은 감각적인 표현과 세련된 대사 때문이었습니다. 번역으로 읽었는데도 이럴 정도면 원문으로 읽으면 어떨까 싶어 일본어 학원에 등록해서 일어를 배우기까지 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서였죠. 그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렬한 독자였던 건 확실합니다. <노르웨이의 숲>,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해변의 카프카>,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기사단장 죽이기>, <태엽감는 새> 등 책장을 넘기자마자 손에 착 붙고,  하루키만의 세계에 깊숙이 침잠하게 됩니다.     

  오자이 다사무나 오꾸다 히데오 같은 작가의 작품도 좋지만 나한텐 여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마음이 갑니다. 한 동안 뜸하다가 요즘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소설만이 아니라 그의 글쓰기 인생에 대한 여정이랄까, 문학관이랄까, 프로 작가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는 과정이 쏙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나에게 좌절감도 안겨주지만 그보다는 위로를 주고, 또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사숙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작가를 꿈꾸는 젊은이들한테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추천합니다. 글을 쓰면서 겪는 일련의 고민과 갈등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게 하나의 통과제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위로도 되고, 새로운 다짐도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한테 다 해당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떤 이들에게는 유익한 조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서 사람에게 가장 큰 깨달음을 주는 건 역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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