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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Dec 10. 2021

작가의 오지랖

- 관심 혹은 관종

  작가들의 핸드폰 온도는 37.5°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장의 온도죠. 독자를 향한 열망의 온도이기도 합니다. e북, 브런치, 카카오스토리, 블로그, 페이스북에 쓴 글을 가능한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작가는 관심을 받기 위해 어떤 장르로든 액션을 취합니다. 이념 혹은 정의를 내세워 작가의 펜을 부러뜨리는 터부나 정언적 명령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작가는 그런 굴레에 저항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인류의 빛나는 정신문화를 빚어낸 건 작가들의 피나는 저항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든, 어떻게 쓰든 다 허용되는 것일까요.  

  최소한 지켜야 할 원칙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먼저 정당한 추론을 통해서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추론과 단정도 구별해 사용해야 하고요. 그게 작가에게 요구되는 기본 자질입니다. 어떤 글을 보면 추론도 엉성하고, 추론과 단정의 경계도 완전히 무너져 있는 걸 보게 됩니다. 단지 신념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그걸 바이러스처럼 퍼뜨리기도 하죠.

       

  극단적인 사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성매매가 합법인 나라들이 있습니다. 직업여성들이 노조를 결성한 경우도 있죠. 이탈리아에서는 포르노 배우인 치치올리나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적도 있습니다. 그녀한텐 국회에 등원할 때 나체로 해야 할지 옷을 걸치고 가야 할지 그게 최대의 고민이었죠. 우리나라에서 성매매는 불법입니다. 불법인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수당이 붙어 턱없이 비싼 가격으로 성매매가 이루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은 아주 극히 정상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동양철학이나 거시경제학을 강의하기도 합니다.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죠. 어떤 사람들은 봉사활동을 하고, 교회에 나가 통성기도도 하죠. 룸살롱에서 이차를 가고, 오피스 걸을 찾는다고 기괴하게 생겼거나 정신적 결함이 있는 게 아닙니다. 커피를 마시듯 여자를 찾는 겁니다. 그런 걸 보면 정부에서 보조는 해주지 못할지언정 정상적인 사람을 한 순간 전과자로 만드는 성매매금지법은 당장 폐지되어야 합니다.       

   

  작가는 통찰력을 가지고 현상을 봅니다. 관찰하는 행위가 본질을 변화시킬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경우도 극단적이긴 하지만 어떨까요?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서른 번쯤 섹스를 하는 남자를 관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사랑의 화신이라고 하고, 전지적 시점에서는 욕망의 포식자라고 침입적 논평을 합니다. 내레이터가 다를 뿐 둘 다 양립 가능합니다. 소설에서의 캐릭터는 개성이 있을 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하루 서른 번쯤 섹스는 한다는 설정은 트릭입니다. 그 정도의 횟수는 물리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을뿐더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침대 밑에 시신을 담을 관도 준비해야겠죠. ‘섹스를 한다.’고 한 번만 쓰면 리비도를 자극하지만 삼백 번에 걸쳐 ‘섹스를 한다.’고 쓰면 거기에는 분명 다른 의미가 함축돼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작가가 섹스 행위의 관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통제받지 않는 욕망의 구원에 대한 대체적 조언이거나 어두침침한 밑바닥까지 내려가 인간의 자기 파괴적 욕망을 함께 바라보는 거겠죠. 인간의 자기 파괴적 욕망이야말로 위대한 가치를 구현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눈에 들어오는 사실만 보지 말고 사실의 의미를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에 진실이 있거든요. 글을 쓰는 일은 고이면서 동시에 기쁨이기도 합니다. 스토리의 리얼리티가 독자에게 현실의 리얼리티로 환원된다면 그건 최상의 즐거움이죠. 그런데 그런 미적 체험은 단순히 문학적인 시스템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시스템과의 유기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문학적 상상력을 단지 도덕적 규범에 맞춰 재단한다면 그건 폭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혹 터무니없이 우리 사회의 규범을 무너뜨리는 불온한 글이 있다면 그건 독자들이 판단하면 될 일입니다.


  비록 여전히 미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어느 한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쓸 수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미래 작가님들한테 응원을 보냅니다. 어차피 작가로서의 생존은 굴욕이면서 동시에 기쁨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글의 각도가 360°를 벗어났다고 해도 그게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건 작가의 숙명이기도 하니까요. 작가로서 짊어져야 하는 불안감이 덮쳐오더라도 그건 크리에이티브의 중력 때문에 생기는 현기증 같은 거니까 너무 심각하게 반응하지 마시고요. 포기하지 않고 글을 쓴다면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말을 듣게 되는 날도 있겠죠.

  “당신이 쓴 글에서 사람 냄새가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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