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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Dec 12. 2021

빵 터진 영화 <지랄발광 17세>

- 자기혐오에서 탈각하는 이니세이션 스토리 


  여주인공 네이딘, 차에서 내려 씩씩거리며 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빈 교실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있는 브루너 선생님한테 다짜고짜 따발총을 쏘듯 지껄입니다.    

  “선생님 시간을 뺏고 싶지 않은데 저 자살할 거예요. 말을 해놔야 할 것 같아서요. 잘은 모르겠지만 육교에서 뛰어내려서 트럭에 치일 생각이에요. 트레일러도 괜찮은데 버스는 안 돼요. 죽는 꼴 남한테 보이긴 싫거든요. 아주 커야 해요. 아주 커서…… 한방에 끝나는 거죠. 안 죽고 불구되면 다른 사람한테도 별로잖아요. 죽여달라고 간호사한테 사주해야죠. 그런데 전신마비면 어떻게……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누군가 어른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서요.”

  네이딘의 말을 들은 브루너 선생님은 아주 시크한 표정을 지으며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한 장 집어 들면서 심드렁하게 말합니다. 

  “그것 참……굉장한 얘기구나, 네이딘.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도 막 유서를 쓰던 참이었거든. (유서를 들고 읽는다)  모두에게.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루에 32분밖에 안 되는 꿈같은 점심시간을 패션 감각 꽝인 학생 때문에 계속 낭비하고 있다. 난 마침내 생각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네이딘을 놀리듯 바라보며) 진심으로 그러고 싶다. 아주 편하겠지.” 

  네이딘은 브루너 선생님의 전혀 뜻밖의 반응에 총 맞은 표정이 됩니다.  

    


  네이딘은 왜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을 했을까요?

  네이딘의 개인적인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왕따였습니다. 집에서도 언제나 관심을 끄는 건 잘 생기고 공부까지 잘하는 오빠 대리언입니다. 워킹맘인 엄마는 네이딘이 못마땅하고, 유일하게 그의 편이 돼주었던 자상한 아버지는 네이딘을 옆자리에 태우고 운전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죠. 그게 네이딘한테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네이딘한테는 다행히 어릴 적부터 베프인 크리스타가 있었습니다. 천사라고 말할 정도로 네이딘에게 위로가 되었죠. 그런데 그런 베프가 오빠와 몸을 나누는 사이가 됩니다. 세상에 자신의 안식처가 돼주었던 베프마저 오빠한테 빼앗겨버린 겁니다. 그로 인해서 오빠는 물론 베프인 크리스타하고도 사이가 멀어지게 되죠. 그때 마음에 두고 있던 참 나쁜 남자 닉에게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써놓고 자신도 ‘이게 뭔 짓인가’ 싶어 삭제하려고 했지만 실수로 터치를 잘못하는 바람에 전송이 돼버리고 맙니다. 미칠 노릇이죠. 네이딘이 닉한테 보낸 메시지는 정말 파격적이었거든요. 

  <그냥 말할게요. 오빠를 몇 달 동안 좋아했어요. 언제나 오빠 생각뿐이에요.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죠. 오빠는 너무 복잡하면서도 간단해요. 우리 둘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요. 이미 오빠를 아는 것 같아요. 오빠와 함께 하고 싶어요. 오빠에게 펠라티오를 해주고 싶어요. 오빠가 내 가슴을 빨아주면 좋겠어요. 오빠를 내 안에서 느끼고 싶어요. 펫랜드 창고에서 해도 좋아요.> 

  이런 메시지를 보낸 자신의 처지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했습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죠. 네이딘은 자신에게 극한 모멸감을 느낀 나머지 자살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브루너 선생님한테 찾아온 것입니다.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만약 학교에 퍼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죠. 핸드폰에서 네이딘이 딕한테 보낸 메시지를 읽은 브루너 선생님은 시크하게 말합니다. 

  “문장을 좀 더 짧게 쓰면 좋겠구나.”

  그리고 계속 학교생활의 불만을 늘어놓는 네이딘을 향해 딱 한마디로 급소를 찌릅니다. 

  “아이들이 너를 싫어하는 거야.”     



  세상에 네이딘의 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닉한테서 ‘와우, 멋진데!’하는 반응이 옵니다. 네이딘은 뜻밖의 반응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마음이 됩니다. 데이트 약속을 한 뒤 정성 들여 치장을 하고 드라이브를 합니다. 차 안에서 노래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닉은 바로 작업에 들어갑니다. 네이딘은 로맨스를 꿈꿨지만 닉은 섹스가 목적이었던 거죠. 그게 여자와 남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실망한 네이딘은 닉한테 욕설을 퍼붓고 떠나버리죠. 다시 갈 곳에 없어진 네이딘은 브루너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결국 브루너 선생님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유하게 되고, 가족과 화해를 한 뒤 크리스타와도 우정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네이딘이 주위의 사람들과 화해를 하는 과정이 과장되지 않고, 담담하게 진행이 됩니다.  


    

  <지랄발광 17세>의 매력     

  첫째, 17세의 주인공 네이딘이 어떤 사람한테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웬수 같은 자식을 보는 느낌을 줍니다. 또 어떤 사람한테는 조카이고, 동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말썽쟁이이기도 합니다. 유쾌 발랄하지만 어떤 때는 아슬아슬한 폭탄 같은 캐릭터가 감득이 되는 건 리얼리티에 근거해서 스토리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연기자들의 매력이 거침없이 발산되고 있습니다. 여주인공 네이딘 역할은 헤일리 스테인펠드가 맡았습니다. 코엔 형제 감독의 <더 브레이브>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건맨들의 세계에 뛰어든 당찬 소녀의 모습을 보여줬죠. <비긴 어게인>에서는 프로듀서 덴 역을 한 마크 러팔로의 딸 역할을 맡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와 <피치 퍼펙트3>에도 캐스팅이 되어 관객들의 눈에 낯설지 않습니다. <지랄발광 17세>는 캐릭터나 대사, 그 모든 게 헤일리 스테인펠드를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 역할을 맡은 우디 해럴슨의 뛰어난 연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우디 해럴슨은 우리에게 <헝거 게임>과 <나우 유 씨 미2>로 잘 알려져 있죠. 코엔 형제 감독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해결사인 칼슨 웰즈 역할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죠. <지랄발광 17세>에서도 시크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신스틸러라고 할 만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셋째, 어쭙잖은 계몽적 교훈이 아니라 질풍노도의 청춘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민하고 불안한 감정에 휩싸인 자학적인 사춘기를 극복하고 정상궤도에 자아를 안착시켜 가는 스토리가 공감이 되고, 구성도 탄탄합니다. 

  넷째, 아이러니한 상황과 잘 어우러진 대사의 매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네이딘이 자살할 거라고 말했을 때 브루너 선생님이 자신도 너 같은 학생 때문에 유서를 쓰는 중이라고 시크하게 되받아치는 장면에서는 묘한 쾌감마저 느껴지죠. 닉으로부터 실망하고 상처를 받은 네이딘을 차를 태우고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브루너 선생님이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죠. 

  “너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네이딘이 쳐다보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합니다. 

  “차에서 내려라!”

  이니세이션 스토리임에도 교훈주의와 엄숙주의를 다 탈색시켜버리고 시크한 유머와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해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극적 효과를 자아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디 해럴슨의 매력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스테레오 타입의 박제된 선생님이 아니라 영혼이 따뜻한 캐릭터를 그의 연기가 창조해 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TV 탤런트에서 영화배우로 변신해서 성공한 대표적인 배우로 인정하는 게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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