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하마 Feb 21. 2022

영화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의 진실

- 신념을 정의로 착각하는 우리 시대에 대한 성찰 

  바늘 끝에 몇 명의 영혼이 올라갈 수 있는가? 

  여자에게 영혼이 있는가?

  예수가 과연 미소를 지었는가? 

  중세에는 이런 질문에 목숨을 걸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에서 패배하면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죠. 사실이 아니라 신념의 싸움으로 생사가 결정된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모든 게 신의 이름으로 지배되던 14세기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스토리는 간결합니다. 장 드 카주루(맷 데이먼)와 자크 르 그리(아담 드라이버)는 전장터를 함께 누빈 친구 사이인데, 자크가 장의 아내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를 범해 이로 인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이는 이야기입니다.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소재이고, 줄거리 또한 그렇습니다. 실재 사건에 근거했다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구성이나 형식이 색다르거나 특이한 것도 아닙니다.            

  챕터를 나눠 서사를 진행하는 수법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라쇼몽>의 구성방식이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차이를 통해서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를 풍자하고, 동시에 진실의 주관성이라는 주제를 완벽하게 구현한 것에 비하면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이미 연출자의 침입적 논평으로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해놓았습니다. <라쇼몽>에서의 동일한 사건에 대한 산적, 사무라이, 사무라이 아내, 그리고 나무꾼의 시각 차이는 진실 규명이 아니라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그런 자기합리화는 인간은 모순덩어리인 속물이며, 인간은 신뢰할 수 없다는 근원적 존재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합니다. 하지만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장과 자크, 자크와 마르그리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재현되다가 제3장의 ‘진실’이라는 전제하에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제1장.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 

  제2장.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 

  제3장.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 진실.

  리들리 스콧의 감독은 제3장에서 마르그리트의 증언을 정언적 ‘진실’로 확정해놓음으로써 논란의 여지를 없애 버립니다. 그러니까 장과 자크가 말한 진실은 과장되고, 왜곡된 기억이라는 전제의 다름이 아닙니다. 진실은 오직 하나, 마르그리트의 진실뿐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게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의 핵심적 전언입니다.       


    


  사실 일반 관객들이 극장에서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보면서 제1장, 제2장, 제3장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리모콘으로 다시 돌려보기를 하지 않는 한 전장터에서 장과 자크의 관계, 자크와 마르그리트의 만남, 특히 눈빛과 키스와 교성의 차이를 한눈에 알아보는 건 쉽지 않죠. ‘감동은 디테일에 있다’는 그 흔한 구절처럼 관객들이 씬의 차이를 감득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제3장에서 ‘진실’이라고 방점을 찍어놓은 건 마르그리트의 서사에 대한 믿음을 형식적으로 알리바이를 만들어 둔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잉 친절이기도 하죠. 그래서 일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마르그리트의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연출자 편의주의에 기울어져 있고, 남성 위주의 폭력적인 액션과 과잉된 낭만적 시선으로 점철된 극적인 전개과정도 불편했습니다. 그런 무지의 폭력과 자기 착각에 따른 애정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이 주는 묵직한 감동과 오락으로서의 즐거움은 결코 반감되지 않습니다.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을 보고나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여주인공 마르그리트의 진실을 향한 주체적 서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게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한 여성의 진실을 향한 몸짓과 의지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스토리와 어우러진 배경과 음악이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중세 시대로 수직적 초월을 하게 만듭니다. 영화를 보면 말과 거위들도 연기를 하고, 나무와 길,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까지도 드라마틱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야말로 뛰어난 미장센으로 다이내믹한 중세의 서사를 생생하게 보여주죠. 14세기 파리의 모습 가운데 노트르담 대성당을 이미지화 한 것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제목에 있는 것처럼 라스트 씬이었습니다. 중세의 기사 갑옷, 말과 액세서리, 부츠, 칼 같은 것은 물론 극적인 결투 재판의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결투에서 승리한 자의 주장이 진실로 인정받는 야만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결투 장면의 리얼리티가 극적인 몰입감을 배가시켰으니까요. 패자에 대한 잔인한 린치도 정의의 이름으로 카타르시스를 유발합니다. 그건 어쩌면 인간의 내면에 파괴적 욕망이 있기에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면의 검푸른 칼라와 실루엣도 중세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효과를 발휘합니다. 밝고 화려한 색깔은 거의 실종 상태입니다. 색깔로 짓누르는 중세의 풍경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행히 맨 마지막에 마르그리트가 아이와 노닐 때, 정원의 꽃과 나무들이 노랗고 푸른 제 색깔을 되찾아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그게 진실의 회복이라는 메시지에 조응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낯익은 연기자를 만나는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맷 데이먼을 볼 때는 본 시리즈의 제임스 본의 그림자가 슬쩍 비치고, 아담 드라이버를 봤을 때는 <인사이드 르윈>에서 ‘미스터 케네디(Mr. Kennedy)’를 부르던 모습과 <결혼이야기>에서 맡았던 찰리 역이 떠올랐지만 이내 사라지면서 중세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는 액션에 이내 시선이 녹아들었습니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에서 도발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알렉스 로더가 프랑스 왕의 역할을 맡은 게 눈길을 끌었고, 벤 애플랙이 야비한 캐릭터의 조연을 맡은 건 의외였습니다.           

  자크를 고소하는 것을 두고 나누는 마르그리트와 장의 어머니 사이의 대사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그와 비슷한 억압과 차별이 우리 사회에 있는 게 현실이니까요. 



  -마르그리트, 너 왜 이러는 거니? 

  -제가 부당한 일을 당했으니까요. 

  -자크 같은 남자들은 언제 어떻게든 마음껏 여자를 품는 거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니? 내 아들이 죽을지도 몰라. 넌 병사들이 전쟁에 나가서 건드린 여자와 다를 게 없어. 그 여자들이 불평하든?

  -전 침묵할 수 없어요. 말해야겠어요. 

  -마르그리트! 넌 우리 가문에 수치를 안겼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에요. 

  -진실은 상관없다. 나라고 젊은 시절이 없을 것 같으냐? 나도 겁탈당했다. 내가 억울하고 괴롭다고 해서 남편에게 울며 고했을 것 같으냐? 걱정할 게 태산인 남편한테 아니, 꾹 참고……태연하게 살았다. 

  -그 대가가 뭔데요? 

  -대가가 뭐냐고? 살아 있잖니.

  -그걸 위해 너무 큰 값을 치르셨네요.

      


  특히 빵터진 대사도 있습니다. 

  -절정을 느껴야 임신을 한다! 

  -강간으로 임신할 수 없습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특히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 장이 칼을 겨누며 고백하라고 했을 때 자크가 끝까지 강간하지 않았다고 말한 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말 마르그리트를 사랑해서였을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나? 아니 그래도 남아 있는 우정 때문에 친구를 위해 마지막 부정의 호의를 베푼 것이었나? 아니면 마르그리트가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핏줄임을 알고 그를 지키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마르그리트가 엄마로서 살아갈 삶은 이제 진실이나 정의보다 아이의 삶이 더 중요하겠죠. 그건 아이를 낳는, 그래서 우주를 만드는 여자의 숙명입니다. 여기저기 씨앗을 흩뿌리는 남자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거 못합니다. 남자한텐 먹고 자고 싸는 게 지상 명제이니까요. 

  무엇보다 마르그리트의 신념이 진실이 된 건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신념은 자기 파괴적 기만이거나 위선입니다. 우리는 합리주의와 과학 만능시대에도 아이러니하게 종종 그런 야만의 모습을 목도합니다. 내 신념은 다른 모든 신념보다 더 고귀하다는 착각과 자기기준의 편견을 정의라고 외치는 소음들이 끊이지 않고 들리는 게 현실입니다.    문명의 야만과 폭력만큼 서글픈 게 또 있을까요.                      

작가의 이전글 영화 <클로저>에 조금 더 다가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