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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Mar 18. 2022

우주의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

-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황도를 따라가던 해가 잠시 속도를 늦추고 하품을 합니다. 쇠바늘 같던 추위도 어느새 깃털처럼 부드러워졌네요. 우주의 벌어진 틈새로 춘풍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대암산의 여신에게 엉큼한 시선을 보내는 수컷 산신들. 화사한 햇볕이 내리쬐는 산등성이를 보면 섹시한 엉덩이를 들이대는 것 같기도 하고, 정력이 넘치는 이두박근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넌 탈락!

  뺀치 당한 계곡은 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돌아서네요. 

  봄날의 산들, 발정하느라 정신없습니다. 그냥 지나가려는 바람결을 오리나무, 갈나무, 자작나무가 앞을 막고 애원합니다. 

  그냥은 못가! 손이라도 잡아줘!

  길게 뻗어 내린 제방은 병명 없이 쓰러져 신열을 앓는 듯 신음소리를 냅니다. 

  나도 뜨거운 남자야. 기회를 줘봐.  

  봄날은 수상하고, 어딘지 불온해 보입니다. 산과 들판마저 저렇게 자지러지는데 사람인들 온전할까요. 금순이도 옥경이도 밭 매던 호미를 팽개치고, 단봇짐을 쌌다는 게 괜한 전설이 아닙니다. 

  이러다가 벚꽃이 퍼드러진 향연이 시작되면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봄바람에 자지러질까요. 하긴 그래 봤자 라면 끓여먹다 아랫도리부터 뜨거워지고, 그러저러하다가 뜻대로 안 되면 혼자서 야동보고 막힌 걸 풀겠죠. 

  야동도 적당히 봅시다. 중독이 되면 눈에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부작용을 앓게 되니까.       


       

  구체화되지 않은 모호한 추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방황했던 시절. 그게 인생의 전부라고 착각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삶의 한 지점과 영원히 결별한 채 어른이 됐습니다. 소중한 시절을 시시하게 한숨으로 날려버린 거죠. 그러지 않았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너무 억울한 나머지 그렇게 했더라도 내 인생은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자학적 독백으로 자서전을 씁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며 내 인생이 더 이상은 소모품이 되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구원 없는 외로움과 허망한 소유에 대한 집착, 그리고 끝내 헐떡거리며 모멸감을 견뎌내야 하는 인생을 마지막 숙제처럼 받아 들고 한숨을 토해 냅니다.  

  외로웠지만 아무렇지 않아. 

  뱉어놓고 보니 그 말이 더 외롭게 느껴집니다. 내 삶과 외로움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웅동체처럼 하나가 된 걸 모르고 있었다니. 딱한 거죠.  

  세상의 모든 게 육체적인 관계로 수렴이 되고 나면 그 뒤에 몰려오는 공허감은 끔찍합니다. 선승이 며칠씩 움직이지 않고 좌선을 하는 건 득도에 다가서려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몸으로 엮인 세상의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시각각 스멀스멀 몰려오는 봄날. 

  돌이켜보면 사랑하지 못한 불능보다 사랑하지 않은 게으름이 더 컸던 젊은 날은 유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완료의 시간에 좌절하기보다는 초월하는 마음으로 봄날을 맞이합니다.

  어서와. 이번에는 잘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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