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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Apr 04. 2022

긴 시간 속에서 숙성된 소설들

-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과 남궁순금의 <바둑 두는 여자>

     글을 쓰는 건 농사짓는 일과 비슷합니다. 씨앗을 골라 잘 일궈놓은 땅에 파종하면 거기서 싹이 나고, 줄기가 뻗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죠.  농부의 손길이 게으르거나 서투르면 알곡을 거두는 건 어림없습니다. 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는 법입니다.

  작가가 단어를 골라 조사와 어미를 붙여 결합시키면 온전히 문장이 됩니다. 고랑처럼 널려있는 여러 문장을 한 곳에 가지런히 모아놓으면 단락이 되죠. 몇 개의 단락을 틀에 맞추면 한편의 완성된 작품이 됩니다. 물론 쓴다고 다 작품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작가의 상상력과 어휘력이 따라야지만 멋진 작품이 됩니다. 그런데 상상력과 어휘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상상력은 고통을 비용으로 지불해야만 얻기 마련이고, 어휘력 또한 장인 정신으로 끝임 없이 조탁해야만 빛나게 됩니다.     


 

   <편의점 인간>은 무라타 사야카 작가 자신의 경험이 투사된 작품입니다. 2016년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죠. 아쿠타가와상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받지 못했죠. 작가는 대학 시절부터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고, 졸업 후에도 취직하지 않고 18년 동안이나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습니다. 한때 교편을 잡았지만 이내 그만두고 편의점 알바와 파트타임 알바를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거는 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하죠. 제도와 관습에 승차하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작가입니다. 그러니까 무라타 사야카에게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이 붙여진 건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편의점 인간>의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는 작가의 의식 세계가 고스란히 투영된 인물입니다. 흔히 말하는 비정상의 문제적 인물입니다. 18년 동안 편의점 알바라뇨. 해독 불가능한 비정상의 인물이죠. 그런데 이 소설의 매력과 철학적 사유는 바로 보통 사람이 아닌 시선으로 보통의 사람들을 시니컬하게 바라보는데 있습니다. 편의점은 그녀에게 있어 자신만의 중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주 같은 공간입니다. 그녀의 별인 셈이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과 인간관계는 그녀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줍니다. 무인칭이나 타자가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서 의미를 띱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편의점을 아주 디테일하게 보여줬다는 점입니다. 상품의 주문과 입고, 효과적인 디스플레이, 소비자들의 성향, 알바생들의 다양한 인생까지 보여주죠. 그건 유튜브나 관찰 카메라 24시와는 다른 느낌이고, 언어로 현현됐다는 점에서 감각의 게이지 수치를 최대한 높여줍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전기 찜질을 당하는 것 같은 마력의 문장들이 많았지만 후루쿠라 게이코 이상으로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시라하의 대사가 뇌리에 각인돼 지워지지 않습니다. 시라하는 경제적 무능력자이고, 자발적 노동 부적격자입니다.


  “그래서 깨달았어요. 이 세상에는 석기시대와 다를 게 없다는 걸.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삭제되어 갑니다. 사냥을 하지 않는 남자,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 현대사회니 개인주의 하면서 무리에 소속되려 하지 않는 인간은 간섭받고 강요당하고, 최종적으로 무리에서 추방당해요.”

  “시라하 씨는 석기시대 이야기를 좋아하는군요.”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주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현대사회의 거죽을 쓴 석기시대예요. 커다란 사냥감을 잡아오는 힘센 남자에게 여자들이 몰려들고,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시집을 갑니다. 사냥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해도 힘이 약해서 도움이 안 되는 남자는 업신여김을 받죠. 구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요.”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출근시간에 늦고, 여자 손님을 스토킹하고, 제수씨에게 빌린 돈 때문에 인간 이하의 수모를 겪는 무능력자이면서도 신기루 같은 창업을 계획하고 있는 백수가 바로 시라하입니다. 자신의 경제적 무능을 인류문화의 제도적 모순에 전가시키는 무모한 인물이기도 하죠. 더구나 후루쿠라 게이코에게 잘 곳이 없어 노숙자가 될 처지에 놓인 자신을 동거인으로 받아준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이상한 논리로 설득시키기도 합니다. 후루쿠라 또한 주위 사람들이 혼자 사는 자신을 너무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그 혐의를 벗고자 일종의 알리바이로 시라하를 집으로 들였던 겁니다.     


  “후루쿠라 씨, 당신은 운이 좋아요. 처녀에다 독신에다 편의점 알바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당신이 내 덕분에 기혼자 사회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당신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고, 주위에서 보기에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모든 사람이 가장 기꺼이 받아들이는 당신의 모습이에요. 잘됐어요!”


  이 <편의점 인간>의 마지막 부분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짠합니다. 후루쿠라는 주변의 참견으로 인해 오랫동안 다니던 알바를 그만두고 이상한 인간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가려고 일반 회사의 취직을 알아봅니다. 이때도 시라하는 기묘한 논리를 펼칩니다.      


  “역시 편의점 알바는 나를 부양하기에는 불안정해. 그러니 백수와 알바가 같이 살면, 백수인 내가 비난을 받게 마련이야. 석기시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은 당장 남자한테 불평을 하지. 하지만 후루쿠라 씨만 정규직에 취직하면 나는 더 이상 그런 피해를 받지 않아도 되고, 후루쿠라 씨한테도 도우이 되고, 일석이조야!”     


  편의점을 그만두고 한 달이 지난 뒤 입사서류를 냈던 회사에서 연락이 와  면접을 보러간 후루쿠라는 화장실로 가다가 편의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편의점에 들어서자 흐트러져 있던 모든 물건들이 그녀에게 도움의 손짓을 내밉니다. 비효율적으로 놓여 있던 물건들이 그녀에 의해 제자리를 잡으면서 이내 편의점은 생명력과 활기를 띠게 되죠. 편의점과 그녀는 운명적으로 주파수가 딱 맞아떨어지는 공간입니다. 그녀의 별은 다름 아닌 편의점이었던 거죠. 그것을 부정하는 건 무지한 집단의 폭력이나 다름없습니다.  

  새 편의점에서 그녀는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합니다. 행복하겠죠. 아니 적어도 불행하진 않을 겁니다. 분명히.       



  올해 신춘문예 작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건 한국일보 소설부문 당선작인 <바둑 두는 여자>였습니다. 당선자의 이력 때문이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걸 가슴에 품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자신을 꺼내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알라딘 램프 속의 거인의 마음이었다가 바위에 꽂힌 칼을 어떻게 하든 꼭 뽑고 싶었던 중세의 기사 같은 절실함도 있었겠죠. 그런 생각이 든 건 남궁순금 씨는 49년간이나 습작을 하고, 환갑 나이에 당선이 됐기 때문입니다.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mbc에서 방송작가를 한 이력이 있더군요. 저도 최근까지 방송국에 있었기에  많은 방송작가들이 등단의 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80년대만 해도 작가로 등단한 뒤 방송작가가 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방송이 산업화되기 시작한 뒤로는 그야말로 방송작가가 대량생산 됩니다. 어쨌든 등단을 하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고 표현하지만 남궁순금 씨는 단순히 꿈을 이룬 게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꿈’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는 건 오랜 시간의 고뇌와 무게들을 다 간과하고, 사상시켜 버리는 실례를 범하는 게 아닐까요? 하루하루 끊임없이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겁니다. 꿈이 아니라 절실한 현실이었을 터. 그래서 시선이 갔습니다.

  <바둑 두는 여자>는 문체가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도발적인 캐릭터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바둑의 소재도 새로운 게 아니고, 오감각을 오그라뜨리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부담이 없는 밋밋한 인물에 현재와 과거가 물이 흐르는 듯 이어지는 구성인데도 다 읽고 난 뒤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그 이유는 과장되지 않은 일상으로 환원되는 인간관계 때문입니다.

  주인공 기연과 우 교장의 만남과 이별은 인간이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태도와 자세를 보여줍니다. 영웅적 서사나 거대 담론을 구현하는 사건보다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은 마치 화학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시골밥상 같은 깊은 맛을 냅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동네 골목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익숙한 인물들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특히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 기연이 우 교장과 기원에서 만난 노인과 각각 바둑을 두는 장면은 콘트라스트로 선명하게 와 닿아 인상적이었습니다.


  ‘우 교장은 일단 넉 점을 깔게 했다. 자신을 의식하지 말고 혼자 연습한다 생각하고 두고 싶은 곳에 척척 놓으라고 했다. 그 말이 기연에겐 위로가 되었다. 남편에게선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우 교장은 바둑을 두는 내내, 표정 변화도 그 어떤 충고도 하지 않았다. 내리 두 판을 두는 동안 기연은 막 입대한 아들도, 비행기로 12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남편도, 자신의 미래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앞에 앉은 우 교장의 존재마저도.’

    

  ‘한 달이 지난 뒤, 기연은 노인에게 졌다. 노인은 자신의 나이가 80인데, 지난번에 내리 세 판을 지고 나서 포석에 사활까지 내내 공부를 했다고 고백했다. 기연은 노인에게 세 번 놀랬다. 솔직하다는 것. 승부욕이 대단하다는 것, 저 나이에도 노력하면 된다는 것. 그러나 만면에 웃음기를 감추지 않고 한 판 더 ‘붙자’고 했을 땐 단호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는 더 이상 안쓰러운 노인이 아니었다.‘     


  똑같이 바둑을 두면서도 태도와 지향점이 다른 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너무 많이 겪는 불편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돈과 직업이 그렇고 친구와 가족도  서로 다른 점 때문에 겪는 불편함은 이미 익숙한 것이 됐죠. 함께 하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다가 서로 죽이려 대드는 원수가 되는 게 어디 드라마뿐입니까.  

  <바둑 두는 여자>의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건 장례식장에서 우 교장의 아들이 기연에게 건네주는 메모의 두 문장이었습니다.


  ‘내가 김 선생에게 빚이 많아요.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내 이야기 들어줘 고마웠어요.‘     


  두 문장에 요약돼 있는 무게와 의미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것 같습니다. 우 교장이 저서전을 쓰고자 한 건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기록하려는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사람이 더 그리웠던 거죠. 아내가 죽은 뒤 자식들과 소원해지고, 가족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바둑판처럼 자신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쓸쓸할 수밖에요. 그때 기연과 만난 거죠. 춤을 추고 싶은 않은 게 아니라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던 겁니다.   


  정직한 문장과 글이 계산적인 전략으로 쓰인 문장과 글을 능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버리면 우리가 읽는 소설은 영혼을 더 삭막하게 만들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바둑 두는 여자>를 뽑은 심사평에 무한신뢰가 느껴졌습니다.

  ‘척력의 시대에 자신과 타인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작가의 사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품의 교졸은 의심받을 수 있어도 세계와 인간에 대한 태도와 신념을 타협할 순 없다.’

  심사평에 고마움을 느낀 건 생전 처음입니다. 문학이 무엇인가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고맙고 또 고맙죠.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에서의 편의점과 남궁순금의 <바둑 두는 여자>에서의 기원은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소설의 경계를 넘어 내 의식으로 들어와 새로운 인물로 육화되는 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면서 소설의 매력입니다. 소설은 단순히 현실을 흉내 내는 모방이 아닙니다. 소설은 대상에 대한 천착과 인식의 소산으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소설을 통해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형성되고, 세계는 더 확장됩니다. 그게 소설의 힘이란 걸 여전히 믿습니다.

  남궁순금 작가에게 늦은 축하를 보내며, 다음 작품이 나오기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기대가 아니라 대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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