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하마 Sep 28. 2022

죽음을 생각하며 걷는 길

     

  시골에서 지내면서 시간 나는 대로 걷는 게 일입니다. 타박타박 걷다 보면 내 발자국 소리와 바람소리, 물소리, 산울림, 하늘소리가 서로 조응이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목숨 값은 하고 있는가. 사람의 자리를 잃고 개가 되진 않았는가. 죽음의 길을 잘 닦고 있는가. ‘최선의 무리들은 신념을 잃었고, 최악의 인간들은 언제나 열정적’인 혼란의 시대에 나는 호흡과 리듬을 지키고 있는가.


                                                                 새벽길


  길을 걸으며 언제부터인가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成三問)이 형장에서 참수를 당하기 전에 쓴 절명시(絶命詩)를 떠올리게 됐습니다.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擊鼓催人命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回頭日欲斜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黃泉無一店

       오늘 밤은 어느 집에 묵고 간담?               今夜宿誰家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성삼문의 생각이 잘 드러난 시입니다.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연장선상에서 삶을 사유하는 건 다분히 동양적인 사고방식이죠. 삶과 죽음을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은 생명 현상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삶과 죽음은 분리되어 있죠. 죽음은 생명체의 기능이 정지되는 육체의 소멸입니다. 그러나 절명시에서는 죽기 직전의 모습을 일상에서 늘 보는 ‘해가 지는’ 현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죠. 그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주막’도 없다는 점을 들어 현세보다 더 황량할 수 있지만 닥쳐올 죽음을 담담하게 수용하고 있습니다. 죽은 뒤에 하룻밤 묵을 처소를 걱정하는 표현을 통해 삶과 죽음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과 죽음 이후의 세계가 현실과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는 점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죠. 죽음을 초연히 바라보는 성삼문의 사유가 내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석양


  우주적인 시간에서 보면 삶과 죽음은 서로 이어진 길로 떠나는 여행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종착지는 없습니다. 길을 떠나는 것뿐입니다. 길이 끝나면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열리겠죠. 물론 새롭게 열리는 길이 지나온 길과 다른 황량함 혹은 쓸쓸함으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정이 들었던 것, 애착을 가졌던 모든 걸 뒤로 하고 홀로 떠나야 하는 여정은 쓸쓸할 수밖에 없죠. 그게 인생이고, 인간의 숙명입니다.      


  오늘도 비틀거리지 않고 잘 걷고 있습니까?             

작가의 이전글 횡재(橫財)와 횡사(橫死)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