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모란이라는 꽃은, 붉기도, 노랗기도, 하얗기도 하는데, 무엇보다도 그 크기와 화사함이 두드러집니다. 크기는 어지간한 청요리 접시만큼 크고, 꽃잎은 여왕의 속치마보다 더 여러 겹입니다. 작약이 거의 홑꽃인데 비하여 장미가 여러 겹의 꽃잎이 겹쳐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사람은 모란의 풍성함과 화려함을 보시면 아마 아까 보았던 장미는 필시 모란의 시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꽃을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모란꽃을 보려면 모란꽃의 씨가 흙에 심기어지고 발아가 되고 묘목으로 자란 후 또 2년 혹은 3년 지나야 됩니다.. 일종의 구근식물이라 일단 꽃이 피기 시작하면 다음 해에 또 꽃이 핍니다.
첫 과정인 꽃씨의 발아부터 까다롭습니다. 반드시 8월 무더위 속에 맺힌 꽃씨가 콩만큼 커지면서 까매지면 채취해서 즉시 땅에 심어야 합니다. 어떤 화훼전문가들은 물속에 약 2주간 담구어 두었다가 씨가 조금 벌어지고 작은 손이 나오면 그 때 땅에 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렵습니다. 이후 다음해 4월까지 기다립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씨가 심어져 있는 땅에 가끔 물도 주고, 땅이 너무 말라 있는 것은 아닌지 바람은 잘 지나가는지 살펴보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다음 해 4월이 되어 애기 손바닥 보다 작은 잎이 보이면 싹이 난 것입니다. 그 상태대로 물 주고 햇빛 쬐게 하면서 약 2년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 심을 수 있는 묘목이 됩니다. 대개 이 때 화훼 시장에 나옵니다. 묘목이 인연 닿는 좋은 땅을 만나서 자라기 시작하여 2, 3년 후 비로소 모란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씨가 발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묘목이 다 꽃을 피울 만큼 잘 자라는 것도 아니랍니다. 까다롭습니다.
이렇게 모란꽃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모란이 피기까지는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런 지식을 가지고 정과리의 ‘한국근대시의 묘상연구’ 109쪽부터 읽어 보시면 이 시를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시는 “꽃이 피는 과정”을 노래한 시이고 움직이는 주인공은 모란꽃, 독자는 구경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모란꽃이 핀 자체를 노래하는 시는 아이라는 것이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에서 오월은 음력 오월이라고 읽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1930년대 5월이 그렇게 덥지 않았을 것이고 모란꽃은 8월 여름에 절정인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시의 “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 나오겠지요. 짐작은 갑니다만 설명이 길어질 듯 하여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