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와 함께 영원히 피어나는, 김소월의 산유화
김소월의 시는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 쉽게 읽힙니다. 쉽게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할 때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단어, 구절들이 우리를 불러 세웁니다. 며칠씩 비가 계속해서 오면 좋겠다는 ‘왕십리’, 일 년 내내 혼자서 아무도 없는 산에 피어있는 산유화 등등. 산유화에 관하여는 그간 많은 해석이 있어 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과 청산과의 거리’라는 말이었지요. 소설가 김동리의 해설 속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 계절의 영원한 순환’이라는 말도 있고, ‘자연에의 초월이 거의 불가능해진 현대인의 좌절이 숭고한 가락으로 읊어진 것’이라는 감상평도 있습니다.
이 시는 ‘영대“라는 잡지에 1924년 10월에 발표된 것이라고 합니다. 김소월은 1902년에 태어났으니 그가 스물 두 살 때 쓴 시입니다. 현대의 스물 두 살과 당시의 스물 두 살은 사회적 성숙도가 다르므로 ’스물 두 살된 청년이 운운‘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습니다. 일단, 1902년생이라는 것만 기억해 둡니다.
김소월의 ‘산유화’라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그런데, 산유화라는 제목의 시는 이백년 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글 좀 하는 선비, 높은 벼슬하던 양반들이 한문으로 지은 시들입니다. 세 편만 보겠습니다.
1653년생 김창흡이란 선비가 쓴 산유화입니다.(고영화님의 2023.9.1. 페북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산유화 3장 / 김창흡(金昌翕 1653~1722)
산에는 떨어진 꽃이 있어
시냇물은 물길 따라 흘러가네.
누대에는 몸 파는 여자가 있어
선량한 남자들이 짝을 찾는구나.
산에는 떨어진 꽃이 있어
시냇물은 물길 따라 떠내려가네.
누대에는 몸 파는 여자가 있어
선량한 남자들이 짝을 기다리네.
산에는 떨어진 꽃이 있어
시냇물은 물길 따라 씻겨 흐르네.
누대에는 몸 파는 여자가 있어
선량한 남자들이 희롱질을 하구나.
산 속에서 꽃이 피어 떨어집니다. 이 떨어진 꽃은 계곡물을 따라 저잣거리로 흘러 내려가서 선량한(?) 남자들의 희롱거리가 됩니다. 무슨 말일까요? 산 속에서 피었다가 계곡물 따라 저잣거리로 흘러간 꽃을 애석하게 생각하는 글일까요? 산 속에서 핀 꽃은 반드시 계곡물따라 저잣거리로 흘러갈 운명이라는 말일까요?
지은이 김창흡은 당대에 꽤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김창흡(金昌翕, 1653년 ~ 172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학자이며 시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 서울 출신으로 좌의정 김상헌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이다. 또한 영의정 김창집,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김창협의 동생이며, 순조때 우의정을 지낸 김달순의 고조부이다. 조선후기 노론을 대표하는 가문으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맥을 계승 하였으며,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
라고 쓰여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주전파의 거두 김상헌의 증손자입니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쓴 ‘산유화’입니다. 떨어진 꽃이 저잣거리로 간다고 썼습니다.
다음으로 이안중이라는 선비가 쓴 산유화가 있습니다.
이안중(李安中)의 산유화
산에는 꽃 피었지만
나는 돌아갈 집이 없네
집 없는 이 몸은 꽃보다 못하네
산에는 꽃이 피었네
오얏꽃 복사꽃이 피었네
오얏꽃 복사꽃은 함께 피어있지만
복사나무에 오얏꽃은 피지 않으리
오얏꽃은 희고 복사꽃은 붉다네
홍백(紅白)이 서로 같지 않으니
떨어진들 복사꽃이 아니랴
이 분은 1752년생입니다. 40년을 미처 살지 못하셨군요. (송석주님의 블로그에서 도움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상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李安中[이안중 :1752-1791]
字[자]는 平子[평자], 호는 玄同[현동], 丹丘[단구]. 본관은 全州[전주]. 충북 단양에서 살았던 조선 후기의 문인. 집안은 5대조 李厚源[이후원 :1598-1660]이 우의정을 역임한 명문이었으나 차차 몰락.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하여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문학에 전념. 특히 고시와 악부에 뛰어났으며 李友信[이우신], 權常愼[권상신], 金鑢[김려] 등과 교유함. 문집으로 玄同集[현동집]이 있으며, 김려가 편찬한 담정총서에도 그의 작품이 전한다. 그 중에서 특히 香嫏傳[향랑전]은 숙종 때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미천한 신분의 향랑을 소재로 지은 작품으로 많은 시인들의 한시 소재로 사용되었다.
위 인용문에서 나온 ‘향랑전’이라는 글에 이안중의 ‘산유화’가 위와 같이 실려 있다고 합니다. 이 산유화라는 시를 쉽게(거칠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꽃은 산이 집이건만, 나는 집이 없다네, 집이 없다고 요염하고 화사한 저잣거리의 복사꽃이 되겠느냐? 청초한 배꽃으로 살다 죽으리.”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하고 그 이야기는 ‘향랑전’ 인듯합니다.
향랑전을 찾아가기 전에 (우리는 지금 ‘산유화’를 읽고 있으므로) 또 다른 산유화를 한 편만 더 보겠습니다.
이유원이라는 분은 아래와 같은 산유화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습니다.
이유원의 산유화
산 위엔 꽃 있고 꽃 아래엔 산 있는데
창자가 끊어질 듯 눈물 줄줄 흐르네.
낙동강 푸른 물 끊임없이 흘러가니
그 원한 물 따라가고 돌아오지 않으리
이유원은 1814년생입니다. 73세까지 사신 후 1888년에 돌아가셨으니 불과 140년 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32세에 과거 급제한 후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대원군 반대 등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도 친하게 지냈답니다. 즉, 당대에 여론형성층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산유화 노래는 매우 비장합니다. 어떤 원한이 가득합니다. ‘산 위에 꽃, 꽃 아래 산’이라고 첫 줄을 쓴 것을 보면 꽃의 처지에서 쓴 글이 분명합니다. 즉, 꽃이 가지고 있는 원한을 쓴 시입니다.
1700년대와 1800년대 200년에 걸쳐서 산유화라는 노래가 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시 이외에도 이덕무의 산유화, 이노원의 산유화, 이우신의 산유화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산유화라는 제목의 시가 지어지게 된 배경으로 위에서 잠깐 언급하였던 “향랑전”을 찾아가 봅니다.
1702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20세된 여인이 강에 빠져 자살하는 일이 생깁니다. 전북대 김세라님의 논문을 인용합니다.
“1702년 관내에서 자살 사건이 생기자 선산부사 조귀상은 이를 조사하여 위에 아래와 같이 보고한다.
향랑은 일선부(一善府) 상형곡(上型谷) 양인(良人)인 박자갑(朴自甲)의 딸로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정숙했으며, 계모가 그녀를 구박했으나 늘 순종했다. 향랑은 17세에 칠봉(七奉)이라는 14세 소년과 결혼하게 되는데 칠봉은 향랑을 원수처럼 여기며 때리곤 했다. 향랑은 3년을 참다가 결국친정으로 쫓겨 가는데, 다시 계모가 구박하여 아버지는 향랑을 숙부에게로 보낸다. 두어 달 후 숙부는 향랑에게 재가를 권하는데 향랑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숙부는 향랑을 박대하기 시작했고 향랑은 다시 시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남편의 학대는 더욱 심해지고 심지어 시아버지조차 향랑에게 재가를 권한다. 이에 향랑은 죽을 결심을 하고 강가로 가 소녀에게 치마와 짚신을 맡기며 자신의 죽음을 알리도록 하고 산유화 한 곡을 가르쳐준 후 물에 빠져 죽는다. 향랑의 아버지는 14일 동안이나 시체를 찾지 못했는데 그 이후에 시체가 얼굴에 적삼을 뒤집어쓰고 떠오른다.
여기서 향랑이 가르쳐 준 산유화는 이러하다
天何高遠 하늘은 어찌 이리 높고도 멀며
地何廣邈 땅은 어찌 이리 넓고도 아득한가.
天地雖大 천지가 비록 크다고들 하지만
一身靡托 이내 한 몸 의탁할 곳 없구나.
寧投此淵 차라리 이 연못에 몸을 던져
葬於魚腹 물고기 밥이나 되어 버릴까나.
(김세라, 전북대, ‘향랑전’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국어문학 2014.2.28.)
그러니까 당시 선비들이 지어서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산유화는 향랑이 죽기 전에 불렀던 노래를 바탕으로, 향랑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감정이입하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한편 영남일보에서는 지방의 설화를 채집하여 향랑의 이야기를 싣고 아래와 같이 민간에서도 향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은 평민인 여성이 절의를 행했다는 것에 상당히 감명을 받아 이를 민간에 널리 전파시켰다. 향랑이 불렀다는 ‘산유화’는 그동안 쭉 구전되어 왔는데 오늘날 구전 채록본에는 “구경 가세/구경 가세/만경창파 구경 가세/세상천지 넓다 해도/이 몸 하나 둘 데 없네/차라리 물에 빠져/물고기의 배 속에나 장사하세”로 변형되어 전승되고 있다. (영남일보 2013.9.27.)“
이제 알겠습니다. 18세기 19세기 200년 동안,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자살한 어떤 여인에 대하여, 그의 절개, 즉 비록 남편이 가정폭력을 행사하여 오갈 데 없이 되었지만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음을 칭송한 노래가 산유화였던 것입니다. 위 논문을 쓴 김세라님은 이것을 “열녀 이데올로기”라고 하며 논박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읽은 시 중에는, 과문하지만, 이유원 혼자 이 향랑의 사연에 비분강개하고 있습니다.
(산도 없고 꽃도 없고, ‘물’과 ‘자살’이라는 테마만으로 모두 ‘산유화’라고 자연스럽게 불리고 있습니다. 더구나 향랑은 강물에 빠졌다고 했는데도 옛 사람 글에는 모두 ‘산 속에 핀 꽃’으로 표현 되어 있고 소월도 그렇게 받아썼습니다. 무슨 곡절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공부가 짧은 것이 恨일뿐입니다.)
이제 김소월의 ‘산유화’를 다시 읽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서두에 김소월이 1902년생이라고 말씀드렸었고 이유원이라는 분이 돌아가신 해가 1888년이며, 또 민간에서 산유화라는 민요가 널리 구전되어 왔다고 하였습니다. 김소월이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을까요? 여러 사람이 쓴 글들의 흐름을 보면 김소월도 향랑의 이야기 혹은 산유화라는 제목의 다른 시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필자는 김소월이 쓴 산유화는 열녀 이데올로기에 젖어서, 혹은 열녀 이데올로기라는 쇠로 만든 상자에 갇혀서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향랑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준 글이라고 읽힙니다. 그렇게 읽으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의 마음이 이해됩니다. 김소월은 꽃이 적막하게 혼자서 피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새도 한 마리 그려 넣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작은 새’입니다. 이제 산에 온기가 퍼집니다. 꽃과 작은 새는 갈, 봄, 여름없이 피었다 지기를 반복할 것입니다. 200년 동안 홀로 울던 시골 여인은 김소월 때에 와서 위로도 얻고 ‘작은 새’도 얻었습니다. 늘 즐겁게 지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사족)
김소월을 민요시인이라고 하는 평가는 요즈음에 와서는 도그마입니다.
맞습니다. 김소월은 민요시인이로되, 민요를 전복한 민요시인, 전해오는 전 근대적인 생각들을 뒤집어엎기 위하여 노력한 민요 시인이었다고 평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