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새해 첫날, 어린 시절 관념적인 문체에 가로막혀 포기했던 《데미안》을 드디어 완독 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마주한 이 책은 '청소년 필독서'라는 이름표가 무색할 만큼 도발적이었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느끼는 묘한 성적 긴장감, 그리고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향한 노골적인 사랑의 표현은 당혹스러울 정도다. 특히 "악에 대해서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데미안을 데몬 즉 사탄으로 보이게 했다. 아마 나에게도 기독교적 윤리사상이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당시 헤세가 자신의 이름 대신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싱클레어는 처절할 정도로 내면의 세계에 몰두한다. 그것은 마치 작가 자신의 내면을 낱낱이 보여주는 해부 도면을 보는 듯해서 감정 이입과 함께 작가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읽는 내내, 작가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집필 당시 헤세가 300차례 가까운 정신분석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그저 성장소설의 외피를 쓴 한 인간이 죽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이야기 같아 보였다. 반듯한 기독교 정신과 자신의 불온한 생각들 사이에서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세상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세상의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인 듯하다.
작품을 읽는 내내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 <하얀 리본>이 떠올랐다. 영화 <하얀 리본>은 1910년대 독일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 속 기독교 엄숙주의는 아이들을 겉으로는 바르게 만들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기행과 범죄를 저지르는 기형을 만들어낸다. 소설 <데미안>에서 겨우 허세 섞인 거짓말 하나 때문에 크로머에게 이용당하고 끌려 당했던, 어린 싱클레어의 행동은 소설 <데미안> 속에서도 비슷한 통제나 엄숙주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부분은 내가 부모로서 아이에게 무의식적으로 가하는 억압과 통제가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후반부, 에바 부인을 중심으로 모인 '카인의 표식'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는 건강한 연대라기보다 사회에서 용인받지 못한 이들의 위태로운 도피처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신비주의로 무장하고 서로를 보듬지만,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그 철학적 요새는 허망하게 무너진다. 이는 영화 <포제션>의 결말과도 닮아 있다. 억압에서 벗어나려 기괴한 도플갱어를 잉태하고 투쟁하던 인물들이 결국 갑작스러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소멸하는 장면은, 개인의 내면적 발버둥이 시대의 비극 앞에서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아무런 사상적 통제도 없는 현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죄가 되지 않는 세상,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내면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헤세에게는 자신의 '이상한 생각'들이 곧 죽음과도 같은 공포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아브락사스와 구도자의 사상을 동원해야만 했던 그의 처절한 '실드'를 보며, 거장에 대한 경외감보다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이 강하게 느껴진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