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by 노정희

<데미안>을 읽고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에게 깊은 호기심이 생겼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100년 뒤를 사는 현대인에게도 이토록 도발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데미안>에 이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을 도전했다.


​헤세가 50대 중반에 썼다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한마디로 '업그레이드 버전의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두 인물로 분리해 서사의 폭을 넓혔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헤세 특유의 메시지를 동어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읽는 내내 지울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방랑길에서 끊임없이 여성을 만나며 이어지는 골드문트의 '구도 생활'은 지금의 잣대로 봐도 지나치게 도발적이다. 그는 여성의 피상적인 아름다움만을 찬미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그의 여정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마치 게임의 '퀘스트 미션'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각 캐릭터들의 인간으로서의 입체적인 감정은 거세된 채, 작가의 관념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써 빳빳하게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골드문트의 성장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설정이라 해도, 여성 캐릭터들을 이토록 '키치(Kitsch)'적으로 소모하는 방식은 못마땅했다. 소설 속 인물들도 결국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들에게서 현실성을 아예 박탈해 버린 점이 불편했다.

​이러한 실망감은 골드문트의 죽음 장면에서 정점에 달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라는 상징과 수많은 여성을 그저 피상적인 기호로만 다루었기 때문이다. 각 상징의 깊이를 파고드는 대신 수평적으로 늘어놓기만 한 채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알맹이 빠진 공허함이 느껴졌다. 피상적인 아름다움에만 몰두한 편집증적인 예술가의 죽음은 슬프기보다 딱하게 다가왔다. 유아기적 애정결핍을 죽음의 순간까지 해소하지 못한 채, 예술로써 극복하고자 했으나, 끝내 실패한 느낌이었다.


​한편, 나르치스는 적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러나 지성을 상징한다는 그가 이성의 단단한 성벽에 갇혀, 날것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려 드는 모습은 오만해 보였다. 소설의 마지막, 삶을 진탕 살아온 골드문트에게 존경을 표하며 비로소 속내를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그동안의 모습이 이중적이었다는 고백으로 느껴졌다. 평생 성직자와 학자라는 '역할 놀이'에 빠져 "자신을 찾으라"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성벽 밖으로 본연의 민낯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세게 말하자면, 그는 세상의 비린내로부터 자신을 격리한 채 지적 고립주의에 빠진 '자폐적 인물'에 불과해 보였다. (헤세가 나의 글을 읽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려나?)


​헤세라는 고고한 명성 때문에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의 글을 평하는 것이 솔직히 부담스럽긴 하다.

또, 문학적 지식이나 깊이도 없으면서 위대한 작가의 글을 표피적으로 함부로 분석한 건 아닐지, 걱정스럽긴 하다. 하지만 100년 전의 작품을 2026년의 '동네 아줌마'가 이토록 감정 이입하며 치열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 작품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헤르만헤세, #예술, #고전,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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