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사랑의 불가능성과 단조로운 평온에 대하여

by 노정희

​제목 참 잘 지었다.

관념적인 표현으로 지루해질 법하면, 가련한 네 주인공의 삶이 질풍노도처럼 달려 나간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네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연민은 절절하다 못해 다정하게 느껴진다. 소련에 무력으로 점령당한 1968년 체코를 배경으로,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들을 바라보는 쿤데라의 시선은 마치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학대받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테레자는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상대를 의심하며,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끊임없이 시험한다. 이러한 불안정 애착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임을 인지하면서도 멈추지 못하며, 상대인 토마시를 지치게 만든다.


​반면 저명한 외과의사 토마시는 부유하는 영혼이다. 당국의 감시와 간섭 앞에 당당하고자 노력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자신의 비겁함을 잊으려는 듯 강박적인 여성 편력을 평생 지속한다. 그는 여성을 오직 하룻밤 상대로만 받아들이며, 그녀들의 '상이성'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공허를 메우는 불쌍한 영혼이다.


​이들 커플은 온갖 수난과 역경을 거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정착해서야 진정한 안정을 찾는다. 테레자는 자신의 집착이 토마시를 이 시골 구석에 가두었다며 자책하고 반성하지만, 정작 토마시는 그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진정한 위안을 얻는다. 특히 반려견 카레닌과의 관계는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정서적 고요를 선사한다.


​인간에 대해서는 끝없는 확인과 의심으로 점철된 고단한 영혼인 테레자조차, 반려견 카레닌에게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 관계 속에서만 '있는 그대로의 사랑'이 가능해진다. 사랑한다는 명목 아래 상대가 내가 바라는 형상이 되길 강요하며 조각하려 드는 인간의 사랑과 달리, 반려견을 향한 사랑은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보여준다.


​하지만 카레닌이 암에 걸려 세 개의 다리로 절뚝이는 장면에서 테레자가 느끼는 깊은 슬픔에 나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족에게 거대한 비극이었다. 그 상실의 기억과 상처가 너무나 강렬했기에, 고작 개의 죽음에 그토록 무너져 내리는 그녀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었다. 또, 작가가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방식에는 동의할 수 있었으나, 테레자라는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연민에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나의 슬픔의 기준이 높아져버린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이 소설은 인간이 인간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가 내가 바라는 형상이기를 끊임없이 바란다. 부모 자식과의 사랑도 다르지 않다. 부모가 옳다고 여기는 어떤 형상의 틀에 아이를 자꾸 맞추려 들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상대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나의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테레자에게 가장 깊이 이입하며 읽었으나, 나머지 인물들 속에서도 나의 파편들을 발견했다.

인간은 가벼우면 묵직한 무언가를 동경하며 자신의 가벼움을 한탄하고, 너무 무거우면 그 무게에 질려 가벼움으로 도망치려 한다. 삶의 아이러니를 네 명의 인물을 통해 표현한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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