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 <타코피의 원죄>를 보고

나는 다정함을 선택하기로 했다.

by 노정희

일본 애니를 보았다. 6화짜리고, 제목은 <타코피의 원죄>다.


3화까지는 거의 지옥이었다.

아이들은 서로를 괴롭히고, 어른들은 폭력적이고, 아이를 방치하고, 자기 연민을 아무런 필터 없이 아이에게 쏟아낸다.

누구 하나 온전한 인물이 없다.


보는 내내 화가 났다. 제대로 된 어른이 없고, 어디에다가 감정이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인공 시즈카라는 아이는 무력함이 정체성인 양, 어떤 폭력에도 대응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를 이용해서, 자신을 함부로 파괴하기 위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또, 약자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아즈미라는 아이를 조종하기까지 한다.


‘능동적 피해자’라는 감각.

맞고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선택하는 태도. 그건 무기력보다 더 무서웠다.


이 작품이 잔인하게 느껴진 이유는 폭력이 과장돼서가 아니라 너무 현실적이 어서였다.


감정은 아래로 흐른다. 상처 입은 어른은 아이에게 쏟아내고, 아이들은 더 약한 존재에게 쏟아낸다.

누군가는 그 흐름을 끊지 못하고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


이 애니는 그 악순환을 과감하게 펼쳐 보인다.

심리문제 백화점처럼 모든 병리를 한꺼번에 넣어버린다. 그래서 더 숨이 막혔다.


그런데 후반부에 방향이 바뀐다. 아이들은 완벽하지 않지만, 조금씩 선택을 달리한다.

아즈마 군은 형에 대한 콤플렉스를 이겨내고, 시즈카의 조종에서 벗어나며, 폭압적인 엄마의 기대에서 벗어난다.

가해자의 입장에 섰던, 마리나는 잔인한 폭력을 멈춘다.

타코피라는 판타지적 캐릭터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무조건적으로 들어주고, 아이들을 괴롭혔던 어른들을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기 때문이다.


개연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건 분명해 보였다.

다른 어른이 되어라.”

아이들을 괴롭혔던 잔혹한 환경이었지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다른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꽤 힘들었다. 초반의 지옥을 통과해야만 후반의 메시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히 배웠다.


부정적 감정은 전염된다.

분노, 폭력, 짜증, 냉소, 체념은 반드시 약자에게로 흐른다.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의식적으로 감정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겠다고,

다정함을 선택하겠다고.


《타코피의 원죄》는 힐링물일까?

나에게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 폭력의 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메시지는 분명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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