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맡겨진 소녀>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를 읽으며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세상에는 범죄자급의 부모 유형도 있겠지만,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모는 각자의 방식대로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의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이 아이에게 '나는 존중받고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아이를 대하는 극명하게 다른 두 부류의 어른이 등장한다.
먼저, 킨셀라 부부처럼 아이와 눈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어른이다. 아이의 미숙함조차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으로 인정해주고, 아이가 느끼는 수치심이라는 감정까지 섬세하게 살피며 존중해주는 어른이다. 이런 어른 곁에서 아이는 '단 한 명의 귀한 존재'로 존중받으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또렷하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반면, 어떤 부모에게 아이는 그저 '애'일 뿐이다. '아이'와 '애'는 사전적 의미는 같으나, 사용하는 뉘앙스에 담긴 무게가 다르다.
소녀의 친부모처럼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아이를 보살펴야 할 책임이자 어깨 위의 무거운 짐으로만 여기는 어른들이다.
소녀의 친엄마에게도 사랑은 있다. 다만 그 방식이 투박하여 아이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런 종류의 어른들은 보통 "애들은 아직 뭘 몰라서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거나, "혼내도 금방 잊어버리는 존재"라며 아이의 세밀한 감정을 헤아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어린 시절 보아왔던 많은 어른의 모습이 소설 속 친엄마와 겹쳐 보였다.
친아버지는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을 아이들이라는 짐 때문에 무거워진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비루한 삶에 대한 울분을 남을 공격하고 비꼬는 방식으로 해소하려는 유아기적 행태를 보인다. 킨셀라 부부의 비극을 은근슬쩍 비꼬고, 감기에 걸린 딸을 두고 부부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라며 함부로 지껄이는 장면이 딱 그러하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소녀가 집으로 돌아와 앉을 의자를 찾는 대목이었다. 다섯 아이를 키우느라 정돈되지 않은 집안에서, 소녀는 이제 앉을 의자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킨셀라 부부의 집에서는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는 존재감을 느꼈다면, 친부모의 집은 많은 아이 중 한 명으로 섞여버리는 가치 축소의 공간이자 서글픈 현장이었다.
또,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기억에 남는다. 킨셀라 부부의 아픈 사연을 가십거리처럼 소녀에게 툭 던져버리는 어른의 무신경함이 참으로 싫었다. 동시에 타인의 슬픔을 대화의 소재로 소비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어쩌면 나의 모습도 있지 않았나 조심스레 되돌아보게 된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에게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 (적절한 침묵과 몸에 배어 있는 작은 배려)를 배웠다.
평생 처음 받아보는 '인간으로서의 존중감'을 가슴에 새긴 소녀는, 훗날 킨셀라 부부와 같은 따뜻한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