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연필은 그냥 연필인 것을.

by 노정희

어린 시절 내 필통에는 몽당 연필 몇 자루가 있었다.

6살 터울 언니가 쓰다 남긴 짧아진 연필에 모나미 볼펜의 하얀 기둥을 스카치 테이프로 둘둘 감아 붙어 놓은 몽당 연필 아닌 몽당 연필 몇자루.


필통은 언니가 쓰다가 물려받은 것으로 거무튀튀하게 변해버린 핑크색 케이스에 여기저기 얼룩덜룩 얼룩진 덮개.


거뭇거뭇한 연필심이 잔뜩 묻어있는 필통 속의 몽당 연필 몇 자루가 부끄러웠다.


필통을 꺼내놓는 것이 부끄러워 수업시간 내내 책상 서랍에 넣어놓았다. 꼭 필요할 때만 남 몰래 꺼내썼다.


반면 내가 기억하는 친구들의 필통은 밝은 핑크 빛 플라스틱 케이스에 한창 유행이던 예쁜 캐릭터가 그려진 반짝이는 덮개를 가지고 있었다. 모서리에 붙어있는 자석이 탁!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새 필통이었다. 그 안에 가지런히 들어있는 깨끗하게 잘 깍인 연필들과 지우개.


30년도 지난 기억이지만 아직도 가슴이 찌릿하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혹시나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끼게 될까봐 최선을 다해 새 필통에 새 연필을 가지런히 넣어주었다. 아들은 이런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지 하루 만에 필통에 낙서를 해놓았다. 가지런히 깎아 놓은 연필들의 심을 모조리 부러뜨려 왔고, 연필을 다섯자루를 넣어주면 3자루만 간신히 챙겨왔다.

아들은 뭉뚝해진 연필이 불편하지 않고 심지어 잘 써진다고 나의 잔소리를 튕겨낸다.


그래, 연필은 그냥 연필인 것을.

쓸데없이 붙잡고 있는 30년전 몽당연필에 대한 기억을 나도 무심히 튕겨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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