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살. 엄마품이 따뜻하고 포근하다는 걸 배웠어. 설거지로 바쁜 엄마를 부르면 안 되는 것도, 기다리면 나에게 오신다는 것도 배웠지.
5살. 아빠가 오실 때 자고 있는 척을 하면 내 코에 맛있는 통닭을 사 왔다며 냄새를 솔솔 풍겨주셨지. 냄새 안에는 알딸딸한 술냄새도 포함되었지.
7살. 학교는 스스로 가야 한다는 걸 배웠어. 엄마가 한 번만 데려다주신다고 할 때 잘 배울걸. 수업이 시작했는데도 운동장에서 놀다 지각을 하고 눈물 콧물 다 흘렸더랬지.
8살. 중력을 배웠지.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다 실수를 하면 여지없이 떨어지면서 말이야. 아직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날 정도의 통증이 기억나.
12살. 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로 나뉜다는 것을 배웠어. 나는 못하는 아이로 분류되었고, 나 스스로가 나를 그렇게 분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앞으로의 인생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
14살. 봄날 교실에서 운동장 스탠드에 하얗게 내리던 벚꽃 비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나의 청춘도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말이야.
18살. 대학이라는 것을 정말 가야 하는지 갑자기 의문이 생겼어. 왜 남들 다 간다고 나도 가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왜 하필 고3에 들었을까? 신기하게 수능 3개월 남겨놓고는 의문이 저절로 없어지며 내 인생 정말 큰 일 나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지.
20살. 뽀로로가 나만큼 놀았을까? 친구들은 선동열 방어율이라며 자신의 학점을 자랑하고 다녔고, 나는 그 한심한 친구들이 자랑스러웠지.
22살. 처음으로 나가본 외국. 호주. 말도 못 하고 떠듬떠듬. 준비 없이 온 어학연수로 좌충우돌의 연속. 일본 친구가 한국 라면은 맛이 없다며 일본어로 뒷담화한 걸, 어찌 알아듣고 국뽕에 차올라 한바탕 했었지. "My country is not your toy."
24살. 남들은 취업도 잘하는데, 나 혼자 빌빌거리는 나 자신이 너무 걱정이 되었지. 모든지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버거웠지.
26살. 취업의 기쁨은 잠시. 겨우 이런 일을 하겠다고 내가 학교를 다녔나 싶어 현타가 왔지. 겸손함과 성실함을 배우지 못해 나의 사회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지.
30살.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 왜 내가 우리 집이 아닌 남편의 집에서 송편을 빚고 전을 부쳐야 하나 의문이 들었지. 남들도 그러고 사니까 그러려니 하려는데 계속되는 물음표는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지.
35살. 제왕절개로 마주한 아이. 신기하게도 초음파 사진과 똑같아서 한 번에 알아보았지. 네가 너구나. 우리 함께 잘 살아보자.
40살. 6살 된 우리 아이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환희를 느끼며 점찍기 책을 들여 밀어보고는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지. 뭐든 때가 있는 것을 그때는 왜 이리 조급했을까.
44살. 앞으로 남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