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양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꾸역꾸역 끝까지 붙들고 놓지는 못한다. 포기하고 책을 던져버리면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까 봐서.
한강 작가의 책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나에게 나타난 현상들이다.
가끔 친구랑 수다를 떨다가 한강 작가 이야기가 나오면 그녀가 내 친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녀의 글은 너무 우울해서 그 우울함이 전염될까 봐, 두려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본다. 그녀는 피해자들의 감정에 완벽히 공감해서 글을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박구용 교수는 한강작가를 문학적 영매라고 표현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이 그녀의 글을 통해 절절하게 느껴져 나는 그녀의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불편하고 아프다.
"작별하지 않는다" 중반까지는 친구 인선의 무리한 부탁받고 준비 없이 제주도를 방문하여 고생하는 경하의 이야기라 책장이 무겁지 않게 넘어간다.
눈이 오는 제주도는 웬만하면 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중반이 넘어가면서 친구 인선의 어머니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때부터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제주도 방언이 낯설어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역사책 한 귀퉁이에서 짧게 들어봤던, 평소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던 제주도 4.3 사건.
피해자들이 겪었던 절절한 이야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묘한 상황에서 힘겹게 시작된다.
역사책 한 줄로 넘겼던 나의 무심함이.
제주도를 몇 번씩 여행하면서 오로지 관광명소와 예쁜 숙소, 카페, 맛집만 찾아다녔던 나의 무신경함이.
미안해진다.
그들에게는 피로 얼룩진 바다였고 들판이었다.
무섭고 황망하고 누구에게 따져 물어야 할지도 모를 막막하던 사람들이 그 때, 그곳에 있었다.
그냥 지나쳐버려 미안하다.
우리나라는 참 안쓰럽고 참담한 시간들이 많았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 처참한 시간들이 나랑은 상관이 없다는 듯이, 평온한 삶이 항상 당연히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듯이, 당당한 대한민국을 누리고 살았다.
겨우 두 달 전까지.
교과서 안에서만 듣던 낯선 단어 "계엄"
그저 가짜 뉴스겠지? 하고 믿지 못했던 그 시간.
그 시간, 국회로 뛰어갔던 시민들. 겁도 없이 맨손으로 장갑차를 막던 청년들.
목숨 걸고 국회로 가서 국민들의 대표로 계엄해제를 시켰던 야당국회의원들.
지시는 받았지만 위법적이라 따를 수 없어 일부러 태업했던 최정예 군인들.
이들이 없었다면, 나의 삶이 광주의 그들, 제주도의 그들과 다를 것이라고 누가 감히 장담을 할 수 있을까?
어리석은 지도자를 뽑은 죄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겪어야 하는 시련이 참 고달프지만.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죽은 자가 산자를 살리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