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흰"을 읽었다. 처음 책장을 펼쳤을 때는 생소한 형식이라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소년이 온다."나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류의 서사가 있는 일반적인 소설일 것으로 기대했었던 모양이다.
소설 "흰"은 하얀색을 가진 일상의 그 무엇, 작가의 추억 속 그 무엇, 그녀에게 잊힐 수 없던 그 무엇에 대한 글들이 에세이집처럼 느껴졌다. 기대와 다른 전개로 잠시 접어두고, 일주일 뒤 다시 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그렇게 몰입이 되지 않던 작품이,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글 속에 영상을 숨겨놓았다가 몰래 보여주는 것처럼 글들이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영상으로 변환되는 경험을 했다. 책을 읽고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신기한 체험이었다.
작품 중의 이런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살아있어도 부끄러운 게 아니야.'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이 부끄럽다는 것일까?
작가의 다른 작품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자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옆에서 절절히 목도하면서,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한 묘한 죄책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점점 없어지는 요즘의 나는, 한강 작가와 같은 예술가가 있어 조금이나마 타인에 대한 아픔을 함께 할 여지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