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란 무엇인가?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내가 다니던 회사는 중견기업 소유 건물 한 층을 빌려 쓰는 외국계 기업이었다. 이 회사는 겉으로는 수평 조직이라는 것을 홍보했고, 속으로도 수평 조직 문화를 가스라이팅하듯 직원들에게 교육했다. 사람의 겉과 속이 다르듯이, 많은 직원들은 겉으로는 수평 조직인 회사에 다닌다고 자랑했지만, 속으로는 너와 내가 다른 직급이며 다른 직위임을 분명히 하는 듯 보였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중견기업 간부가 탔고, 말단 직원으로 보이는 남성 세 명이 타서 간부에게 큰 소리로 90도 인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말단 직원들이 먼저 내린 후 간부의 어깨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뽕이 잔뜩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나까지 같이 목례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큰 결례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언의 위압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때 문득 이런 상상이 들었다. 그 중년남성은 어느 날 죽음의 문턱을 넘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을 어느 중견기업의 간부라고 소개할 것 같다는 상상 말이다. 자신과 자신의 직위가 일치하는 그런 모습. 밖에 나가면 그냥 동네 아저씨일 뿐인데도 말이다.
이런 주제를 잘 보여준 드라마가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다. 원래 소설은 김 부장 편, 정 대리 편, 송 과장 편 세 부작으로 출판되었다. 소설의 기원은 어느 부동산 카페에 올라온 소설이 인기를 모으며 시작되었고, 송희구 작가는 유명한 부동산 투자자이기도 하다. 소설은 김 부장의 허세와 몰락과 함께, 부동산투자나 절약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드라마는 인물의 자아정체성이 실직을 통해 회사로 부터 분리되고, 상실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보는 내내 공감할 수 있었다.
요즘은 '워라밸'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내가 직장 신입 시절에는 딱히 그런 단어가 없었다.
어느 날, 워크홀릭이던 팀 내 과장님이 담배를 피우며 나를 불러냈다. 요지는 왜 주말에 출근을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요즘은 말도 안 되겠지만, 20년 전 중소기업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평일에 야근하는 것도 굉장히 억울했던 터라, 주말에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천천히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에 내가 그 과장님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과장님, 제가 어떤 이유로 죽어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너는 살아있을 때 뭐 하고 왔니?' 이렇게 질문하시면, 'XXX 회사, XXX 팀에서 문서 만들고 장부 쓰다 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뭔가 느낀 게 있었는지, 과장님은 먼 산을 바라보며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우고는 "노 주임, 가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과장님은 업무에 너무 몰입하고 있어서, 자신처럼 회사에 다니지 않던 나름 신세대였던 내가 참 부담스러우셨을 것 같다.
직장일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그 목적이 다르지만, 나는 어느 날부터 생존을 위한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직장 내에서 받는 어떤 대우가 나의 가치를 상징한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김 부장처럼 나의 자아와 회사 내 처우가 일치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전업주부가 되어 그런 갈등을 할 회사도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