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

진정한 세계의 주인을 목도하다.

by 노정희

<세계의 주인> 영화 포스터

감독 : 윤가은


<영화 스포 강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12.3 계엄의 1주년을 맞은 아침이다. 작지만 지치지 않았던 응원봉의 힘으로 되찾은 민주주의를 즐거운 마음으로 누리고 있는 요즘이다.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쉽지 않게 느릿느릿 정리되고 있으며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 같지만, 지난 1년은 인생사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완벽한 진리임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오래간만에 영화관에서 "세계의 주인"을 관람했다. 명작이라는 입소문만 들었을 뿐 어떤 주제인지 전혀 모르고 봤던 터라, 미친 듯이 눈물이 쏟아져 당황스러웠다. 나보다 어리지만 더 어른스러운 세대들의 작지만 강한 응원봉의 힘에서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 것처럼, 영화 "세계의 주인"에서도 비슷한 종류의 울림을 받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아이 친구 엄마는 딸이 혼자 귀가할 때마다 불안해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딸이 현관문을 열 때면 "누가 지나가면 열지 말고 기다렸다가 사람이 없어지면 들어가.", "집에 혼자 있을 때,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도 절대 열어주지 마."라고 거듭 당부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말미에는 "그러다 사고 나면 정말 끝장, 인생 끝이잖아."라고 내게 말했었다.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 범죄에 대한 두려움은 완전히 공감되었지만, "끝장", "인생 끝"이라 단정하는 그 말이 왠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영화 "세계의 주인"은 주인이라는 인물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다. 성폭력 범죄의 피해 당사자인 주인뿐만 아니라, 부모는 부모로서, 주인의 남자친구와 친구들 모두 이 범죄의 피해로 각자의 어려움을 겪는다.

​범죄 피해는 개인과 주위 환경에 따라 빨리 극복되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며, 혹은 영원히 아물지 않기도 한다. 데고 찢긴 살점이 아물더라도 딱지가 생기고 흔적이 남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성폭력 피해라는 것에 괜한 의미를 더한다. 피해자다움을 은연중에 강요하기도 하고, 피해자들이 밝게 지내면 이상스러운 억측을 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극복하기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쓸데없는 시선을 보내며 그들을 더 힘들게 만든다.

​영화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아픔을 이야기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건강한 방법으로 서로를 치유하고 극복해 나가는지를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한다.

영화는 피해자들의 연대를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상처를 겉으로 꺼내놓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보듬고 기다려주는 장면을 보여준다. 또한, 주인의 동생이 초딩스럽지만 의젓한 방식으로 누나를 보호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 피해자 친구들이 상처를 배려해 뭔가 어색하게 구는 것도, 그들을 완전히 이해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또 다른 2차 가해일 수 있다는 것을 꼼꼼히 지적한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 섣부른 재단과 판단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로 다가갈 수 있음을 다시 깨닫게 해주는 영화였다.


​나보다 어리지만 훨씬 어른스러운 아이들의 작지만 강한 응원봉과 영화 속 주인의 건강한 치유 능력을 보며, 한없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철없는 아줌마는 눈물 콧물을 쏟아버렸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건강한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오늘도 해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루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