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그리고 배려의 의미
어제 기말고사를 끝낸 아이와 한 시간 넘게 나름 철학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아이는 노력한 만큼, 능력만큼 결과가 나와야 그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아이가 궁금해한 것은 반 친구 중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학교의 배려였다. 음악 선생님이 그 친구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 덕분에 그 아이와 자신이 같은 점수를 받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 의문을 제기했고, 뭔가 억울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아이는 장애가 있으니 비장애인이 당연히 배려해 줘야 마땅하지"라며 단호하게 일축하며 말했지만, 아이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아이의 논리는 이렇다. 운동 신경이 좋거나 나쁜 아이, 수학 재능을 타고났거나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다. 타고난 재능에서 차이가 존재하지만, 100미터 달리기나 수학 시험에서 재능 있는 아이가 더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만 경쟁의 장에서 특혜를 주는 것이 올바른지, 사회배려자 전형이 치열한 대학 입시에서 특혜가 아닌지 불합리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순간 '무슨 뻘소리냐?'며 일축하려다가,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또, 아침에 썼던 글이 생각나기도 해서, 나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의 내용을 빌려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노력해서 뭔가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것이 100% 네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네가 우리 집과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운'이 작용한 결과다. 저개발국가에서 태어났다면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네 노력이 중요했지만, 우연히 얻게 된 운에 의해서 얻어진 결과이기에, 네 노력과 재능으로 얻는 경쟁의 결과가 반드시 '완벽하게 공정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재능의 영역을 넘어 장애는 또 다른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장애 판정을 받았다는 것은 치료로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며, 이 부분은 우리가 공동체로서 배려해주어야 하는 영역이 아닐까 설명했다. 또한, 사회배려자 전형은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에 정원 외로 진행하는 경우도 많다고 부연했다.
아이와 논쟁과 말싸움을 넘나드는 시간을 보낸 후, 아이가 내 말뜻을 제대로 받아들였는지, 나도 아이의 속뜻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모른 채로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지금 글을 쓰다보다, 서로 다른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대화 말미에 지적 장애 아이를 둔 엄마의 에세이를 아이에게 들려줬다. 그 어머니에게 학교 점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스스로 독립하고 공동체 안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며, 자신의 소원은 '아이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울컥했다. 자신도 반 친구를 보면 잘해주고 싶어서 같이 놀다가도 불편한 점이 많이 생겨 자연스레 피하게 된다고 했다. "이런 내가 잘못된 것인지" 물었다.
나와 관계없이 멀리서 보면 안타깝고 슬프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곧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기에, 아이에게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만할 수는 없었다. 나 또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로 지하철이 지연되었을 때 지각할까 봐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에게 "우리는 좀 더 운이 좋게 태어났으니, 불편하더라도 좀 더 배려해 보자"라고 이야기하며 대화를 매듭지었다.
나의 행동과 말이 달라 아이에게 배려하는 인성을 진심으로 가르치지 못한 것 같다는 뭔가 씁쓸함이 남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