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20대 중반에 처음 하는 미술, 유학까지도 가능할까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지만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는 20대 중후반의 (거의 모든 면에서) 애매한 어른들. 둔치의 주요 고객이다.
우리에게 건네지는 질문들은 어떤 반경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고 우리가 선생으로서 기꺼이 빚어내야 하는 갈등의 포인트도 매해 비슷하다. 이렇듯 매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풍경 속을 걷는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새로워진 모습으로 전 해와는 다른 장면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한다.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포트폴리오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요”
“욕심 내면 곧바로 미국 대학원까지도 가능할까요?”
“제가 보기보다 나이가 좀 있어요. 이 나이에 뭔가를 처음으로 한다는 게 괜찮은 걸까요?”
“어떻게 꾸역꾸역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긴 했는데 제가 하고싶은 게 뭔지를 도통 모르겠어요”
위 질문에 즉답을 하자면 뭐든 불가능한 건 없고, 몰라도 좋고,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새로움을 향해있다는 뜻일테니 “어설퍼도 좋으니 시작해 보자!”
우리나라에서 대학 졸업장이야 별 의미 없다는 거 공공연한 사실이고, 20대 중반에 각종 현타가 휘몰아치는 것도 피차 아는 바고, 욕심 부리는 거야 내 마음이고, 그렇게 하다보면 안될 것도 없으니 질문에서 부대낄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답에 대한 반응은 감히 말하건대 ‘언제나’ 절망적이고 싸늘하다. 새로운 시작점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설렘이나 흥, 그런 건 어느새 자소서에나 나올만한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미술, 창작이 주는 재미, 내 것에 대한 애정 같은 건 너무나 추상적이란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답이 없는 걸 탐색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불안하고 두려우며 불필요한 일이다.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맛없는 눈빛은 너무나 지루하고 상투적이지만, 본래의 궤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들의 동기가 거짓되다고 생각하고싶지는 않다. 불길함을 감지하고 다른 궤도를 탐색하기로 한 선택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였을 테니까.
하지만! 정반대로도 생각이 가능하다. 다른 궤도로 옮겨타는 건 얼마든지 가능해야 하며, 불쑥 미술 즉 새로운 것을 하겠다는 건 언제든지 기꺼이 길을 잃어보겠다는 선택이었을 테다. 그러므로 눈빛은 살아있어야 했다. ‘답 따위는 집어치워! 내가 걷는 길이 당장은 좀 볼품없어 보여도 걸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할거야’ 하는 마음일 수 있어야 했다.
“나이가 좀 있으니” 돈은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자니 해본 것 보다는 아직 못해본 게 많고 그래서 하고싶은 걸 맘껏 하기엔 부모님의 눈치는 또 적당히 봐줘야 하는 20대 중후반의 웃자란 어른들. 그들의 용기가 처음부터 그렇게 애매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궤도 변경에 대한 환상 말고는 그 어떤 알맹이도 내밀어 보이지 못하는 장면의 반복은 우리 사회에 주어진 커다란 과제다.
창작하는 시간에만 찾아오는 간질이는 그 느낌을 어떻게든 경험해보게 하려고 한겨울에 언 바다를 걸어도 보고, 속상해서 돌아버리겠다며 우는 얼굴에 매운 말을 퍼부어도 봤다. 신이 나게 해주려고 대신 김칫국도 마셔보고 ‘나라면 이토록 설레지 않았을까’ 하는 대사도 날려보지만 ‘선생님 나라 말로 부담스럽다는 말은 어떻게 해요?’ 하는 표정이다. 설렘을 떠먹여주는 것도 일종의 강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어느 순간 마음이 탁, 멈춰 서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 다른 한켠에서는 ‘이 시간이 설레기는 커녕 온갖 추상적인 것들로 불안하겠지만 언젠가는 아픔을 더 세게 꼭 껴안으며 겨울 하늘을 날 내 새끼들’ 하고 미련에게 호소한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되새김질을 통해서라도 설레임과 동행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길, 그렇게 한번 더 설레게 되길!' 하고..
그렇게 얼려두었다가, 느끼기를 미뤄두었다가 ‘아차!’ 하고 뒤늦게라도 볼 수 있는 거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