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함을 제공합니다

09 강남 동거

by 열원

충무로 고시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강남께에서 D와의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특별한 만남은 아니었고 나는 서로가 별로라 생각한다고 느꼈다. 나쁘진 않지만 확 끌리는 것도 없는 정도. 비호감은 아니지만 굳이 붙잡아 연락하고 싶지는 않은 정도. 헤어질 때가 되자, D가 바래다주겠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택시를 타야 하는 나를 위한 매너 이상의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 D는 사회인의 기본 매너를 가득 채운 사람처럼 보였기에 그랬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D의 차를 보고 보통 가격은 아닐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D는 화려하고 깨끗한 차에 나를 태운 뒤 열선 시트를 틀고 선루프를 열어주었다. 빌딩과 차들과 밤하늘을 흘긋흘긋하며 충무로에 도착했다. 역 근처 아무 데나 세워달라 말했고 D가 간 것을 확인한 후 고시원으로 걸어갔다.


D가 다시 연락을 한 건 두 달 정도 지나서였다. D는 바빠서 이제야 연락한다 말했고 우리는 다시 약속을 잡았다. 관계의 진전을 기대한 건 아니다. 심심했고, 만남이 흥미로운 편에 더 가까웠기에 만났다. 밖에서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D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아 D의 집으로 가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얘기하다 D는 대뜸 자신이 보고 싶었느냐고 물었다. 기대하는 눈을 보고 차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 보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보기 싫은 건 아니었으니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환하게 웃는 D는 그럼 사귀자고 말했다. 말했듯, D가 싫지 않았지만 확 끌리지는 않았다. 나는 매우 우울하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내뺐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말을 들은 D는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조금씩 나아질 수 있도록.


저 역시 결혼의 무게가 남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만큼이나 가벼웠다고요. 결혼 전에 남편이 최고급 외제차에 저를 태워줬어요. 추운 겨울이었는데 히터를 틀어줬어요. 틀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제 몸을 감싸더군요. 그 순간 남편이 차 안에 선루프를 열어줬습니다. 히터와 선루프. 너무나 쾌적했습니다. 그때 전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이 남자가 나에게 최고의 안락함을 제공할 사람이다. 결혼은 저에게 그런 것이었습니다.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에서 김희선이 한 대사다. D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나 이 드라마를 봤을 때, D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D가 ‘안정적인 어른’ 같다 느꼈기에 고백을 받아들였다. D는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날에도 나를 바래다주었다. 그런데 집요하게 고시원까지 가겠다는 게 아닌가. D는 고시원 건물을 보고 같이 들어오더니, 방을 빼고 자기 집에서 살자고 말했다. 얼결에 그러자고 했다. 그날 사귀기 시작했으니, 그날 생각한 제안이었을 텐데도 안전한 제안 같았다. 흔들림 없이 편안했던 D의 자동차처럼, D 역시도 그런 사람일 것 같아서 그랬나 보다. 뭘 해도 안전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같이 짐을 챙겨 트렁크에 싣고 충무로를 떠났다. 내 충무로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비싼 밥과 커피를 얻어먹고, D의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강남역에서 이렇게 가까운 오피스텔에서 살게 되다니. 전에 성신여대에서 애인과 살고 난 후 동거는 다시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D는 어른 같았다. 최고의 안락함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갑작스러워도 될 것 같았다. 처음 보고, 두 달 만에 다시 보자마자 사귀고 동거까지 하는 게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며칠 뒤 D가 회전초밥 집에 데려갔다. 처음으로 접시의 색깔을 신경 쓰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D는 강남 학원 건물들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무슨 학원을 다니고 싶은지를 물어봤다. 나는 애 취급을 하는 것 같아 다니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에, 내 노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인식했다. 어영부영 대화가 끝난 그날 뒤로 D는 자기 사업을 하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사업인지도 몰라 들어오지 않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거의 내 집이었고 가끔씩 들어오는 D에게 칭얼댈 뿐이었다. 애 취급받기가 싫다고 했지만, 애처럼 말이다. 들어와도 같이 누워 잘 뿐이었다. D가 없으면 혼자 오피스텔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다. 아침에는 직장인을, 밤에는 놀러 나온 사람을, 새벽에는 취한 사람을 구경했다. 오피스텔의 창문은 세상을 담아놓은 스크린 같았다.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바쁘게 움직이거나 놀러 다니지 않아도 행복했다. 그런 것이 우습게 느껴졌고, 나는 안락한 오피스텔에서 평생을 보내면 될 것 같았다. 재밌지 않나, 힘들게 출근하는 직장인을, 놀려고 분주히 걸어 다니는 사람을, 힘겹게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을 보고만 있는 것이. 특히 첫차를 기다리는 취객을 좋아했다. 그들은 좀비처럼 움직였고 여긴 좀비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공간인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물원의 동물처럼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우리에 갇혀 먹이도 사냥하지 못하는 동물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는 꼴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안락한 무기력 상태였다.


나는 오피스텔을 깨끗이 했다. 집에서 할 일이 없으면 D의 옷을 개고 청소를 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D는 깨끗한 집을 보고 화를 냈다. 내가 이러려고 너랑 사귀는 줄 아냐고. 그러고는 제대로 된 일을 하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단기 아르바이트만 하고 있었으니 한 말이었다. 그 집에서 지내다 보니, 내 공간에 대한 욕구는 사라져 가고 그 집에 녹아들고 있었다. 어차피 D도 거의 들어오지 않으니, 내 것이라 여겼나 보다. 그것과 별개로 D에게 서운해 이렇게 말했다. 나도 조금씩 노력할 테니까 천천히 지켜봐 달라고. D는 그렇게 해서는 바뀔 수 없다고 말했다. 우습게도 역시 사업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는 못 살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음에도, D가 조련을 하며 키워주는 건 싫었다.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었다. 소리 없이 울던 나는 헤어지자고, 이번 달 말까지만 있겠다고 말했다. D도 별 고민 없이 그러자고 했다. 월이 바뀌자마자 사귀었으니 꼭 한 달을 채운 동거였다.


이제 와서 그 결정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됐어요.


김희선이 드라마에서 위 대사를 맺으며 이런 대사를 했다. 나도 어리석었던 것 같다. D는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당장의 안락함이 아닌 스스로 살아갈 힘이었다. 그 공간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내 것이 될 수도 없었다. 내 것을 얻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이전 08화다시 돌아오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