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학동 원룸
크리스마스도, 연말연시도 연인인 S와 보냈다. 그동안 해방촌에 가면 초입에만 갔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처음으로 제대로 둘러보았다. 후암동 108 계단을 걸으며 갯수가 맞는지 세며 걷기도 하고, 길가다 보이는 독립서점에 들르기도 하고, 예쁜 골목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같이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 녹사평역까지 가고, 녹사평역에서 해방촌 입구까지 걸어가고, 해방촌 입구에서 오거리까지 올라가고, 거기서 남산에 붙어있는 소월로로 올라가면, 건물들과 하늘이 보였다. 서울을 생각하면 나는 소월로에서 본 해방촌이 떠오른다. 유명한 남산타워가 등져서 보이지 않아도 그곳이 서울처럼 느껴진다. 낮은 건물과 옥상들이 보이고, 그 너머에는 높은 건물들이 보이고, 하늘은 회색 빛깔이었다. 서울은 그렇게 낮은 건물들 가까이에 있어도 우뚝 선 높은 건물이 그득한 곳이었다. 어쩐지 같은 바람이 불어도, 더 쌀쌀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20.12.26, 크리스마스이브에 이태원에 있는 이상한 골목들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하도 오르막이 심해서 이러다 남산 타워까지 가는 것 아니냐며 웃었다. 그때 문득 내 과도한 민감성이 경종을 울렸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나 같은 관광객을 보며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 같은' 이란, 남의 동네에 와서 하하호호 즐기며 사진을 찍어대고 감성에 젖는 사람을 말한다. 혼자 간 게 아니니까 애써 그런 마음을 누르고 사진을 찍는데 어떤 집의 우편함이 눈에 띄었다. 나처럼 자동차 일자무식도 알만한, 벤츠 로고가 떡하니 박힌 검은 서류 봉투가 있었다. 그제야 내가 서울에서 가장 싼 동네에 월세로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사람들이 나보다 잘 살겠구나 싶었고 덕분에 마음 편하게 사진을 찍었다. 끝.
우리는 그날 한참을 걸었다. 거리도 거리지만, 상당한 언덕의 이태원과 해방촌을 다녔으니 꽤나 힘들었다. 언덕을 오르니 신기한 건물이 나오고, 예쁜 카페가 나오고, 놀이터가 나오고, 그럼 잠시 쉬다가고. 밤이 참 짧은 날이었다.
12월 31일에는 S와 한강에 갔다. 우리의 목적은 마지막 날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예쁘게 입겠다고 코트를 입고 추워서 벌벌 떨었다. 나는 귀가 시려서 목도리로 얼굴을 둘러 귀를 감싸게 했다. 그래도 귀와 코가 새빨개졌다. 입도 굳어 제대로 말도 못하는채로 갈대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강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를 사 손과 볼을 녹이다 마셨다. 대학동에 돌아와서는 S의 집으로 갔다. 우리는 술을 좋아했으니 그날도 술을 마셨고, 그러다 새해를 맞았다. 각자 핸드폰으로 지인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는데 메시지가 한참동안 가지 않았다. S에게 차라리 비둘기가 빠를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시답잖은 말을 자주했는데 S는 그런 말도 잘 받아주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우리는 다시 술을 마셨다. 바닥에 앉아 S의 침대에 등을 기댔다. 카펫을 손으로 쓸기도 하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다. 내 공간만큼이나 누군가의 공간도 소중했던 날이었다.
언젠가 S가 한강을 넘는 지하철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무리 서울에 살아도 한강이 신기하고, 아무리 서울에 살아도 한강이 신기할 것 같다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한강을 넘으면 늘 창밖을 바라봤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한강을 넘는 게 조금은 버거운 일이 되었다. S와 만나고 있을 때에는 S가 보고 싶어서, 헤어진 뒤로는 더 보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S가 보고 싶지 않을 때도 한강을 넘는 게 버거웠다. 나에게 한강이 계속 특별할 것 같아서 힘들었나보다.
위에 쓴 일기에서처럼 늘 가벼운 마음으로 살고 싶다. 누가 불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신경쓰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냥 사진이나 찍지 뭐, 하는 마음으로. 가벼워지려 자꾸 환기시켜도 답답한 공기가 차오른다. 그러다 답답함에 익숙해져 환기를 까먹게 된다. 원래 공기가 이랬지. 서울에 살아가는 이야기인 이 글을 쓰면서 몇몇 주변인에게 서울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원래부터 서울에 살던 이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치, 서울은 그냥 서울이지. 아무리 그래도 나는 평생 서울을 그냥 서울이라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 뭐지. 나도 몰라. 특별하고 거대하고 조금은 무섭고 여전히 신기한 도시. 처음 서울에 오고서는, 나는 뭐든 금방 싫증나는 사람이니까 서울도 금방 질릴 것 같았고, 서울이 질리면 해외에 나가서 살고 싶다 생각했다. 다른 큰 도시에 살다가 질리면 또 다른 도시로 가거나, 서울로 돌아오거나. 그런데 당분간은 떠날 일 없이 서울에 머물 것 같다. 가능성과 별개로 서울이 평범해질 날을 기대한다. 서울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이 잊힐 때가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