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가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 도토리묵, 고추소스, 식혜. 며칠 전에는 갑자기 할머니 만두가 생각났다. 그래서 설 당일 전화 온 엄마에게 할머니 만두를 부탁했다.
명절이 지난 내일 내려가야지. 모레 약속을 잡은 선생님과, 할머니 만두와, 부모님 얼굴 보기를 위해.
부모님과 하루를 보내고 참치캔과, 스팸과, 영양제와, 누룽지와, 할머니 만두를 챙겼다. 그러고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선생님과 접선했다. 오늘의 일정은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같이 올라가는 것. 선생님 친정이 의정부라 나를 서울에 떨궈주신다고 하셨다. 나는 설날이 지나서 내려간 아들이었고, 선생님은 연휴가 다 지나서 가는 딸이었다. 아무렴 어때. 선생님 어머니도 여유롭게 오는 게 좋다고 하셨다는 걸.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같이 올라가는 7시간 40분 동안 실컷 수다를 떨었다. 우울과 가족과 하고 싶은 것들의 대화였다. 도착해서는 선생님이 과일 박스를 꺼내주셨다. 내 생각이 나서 사셨다고. 친한 과일가게 사장님에게 제자 선물이라고 하니 귤까지 얹어주셨다네. 커피라도 내가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영하 17도라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셨는데 나는 집 떠날 때 실컷 환기를 하겠다며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나갔었다. 냉골인 집에 들어와 보일러를 켜고, 창문을 닫고, 전기장판을 틀었다. 과일과 만두를 냉장고에 넣고 손발만 씻은 뒤 침대에 누워 누룽지를 먹었다. 너무 추워서 이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겠더라. 배가 고프진 않은데, 만두가 너무 먹고 싶어서 냉동실에서 할머니 만두를 하나 꺼냈다. 나는 차가운 만두가 좋아. 할머니 만두도 베란다에서 차갑게 식은 게 좋아. 그런데 보냉팩에 담겨 와 냉동실로 직행한 만두는 꽝꽝 얼어 먹을 수가 없네. 전자레인지에 30초만 돌려 먹었다. 찬 것도 뜨거운 것도 아니지만 할머니 만두라 좋아.
너와 전화를 하며 커피를 한 잔 사 왔다. 아직 10시 반이니까, 백수는 그리 일찍 자지 않아도 되니까. 너에게 할머니 만두를 자랑했다. 나는 할머니 만두를 엄청 좋아하는데 아홉 개나 가져왔어. 좋으니까 아껴먹을 거야. 최소 한 달은 먹어야지. 너도 좋으니까 목요일에 하나 줄게. 아니, 정정. 두 개 줄게.
아홉 개 중 하나를 먹었으니 여덟 개가 남았다. 더 먹고 싶었지만 두 개는 냉장실에 넣어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선생님이 준 사과랑 먹어야지. 세니에게 전화가 왔다. 세니는 내게 하고 싶은 것만 하라고 했다. 응, 그런데 자꾸 의무적인 것들을 해야 할 것 같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지만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말하다 여행 얘기를 하다 전화를 끊었다.
보일러는 도는데 어디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다. 이불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 내 인스타그램을 구경했다. 내 글을 보다,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할머니 만두가 더 먹고 싶어졌다. 냉장실에 넣어둔 만두 두 개는 별로 녹지 않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만두를 꺼내니 이번에는 너무 데워졌다. 나는 차가운 만두가 좋으니 식혀야지. 그렇지만 냉장실에서 차가워진 것보단 찬 공기에 차가워진 게 좋아 창 바깥에 만두를 두었다. 그리고 이런 만두로 가득한 글을 쓰고 있다. 아참, 사과도 먹었다. 선생님도 아침에 먹으라 했고 아침 사과가 금사과라지만 내가 지금 먹고 싶으니까. 사과를 먹으며 글을 쓰고 이제 식은 만두를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