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그리움이 여름으로 피어난다면

by 소혜


어느 담벼락 앞을 지날 때면 주변의 소음이 맑은 주황빛으로 공명했다. 사납게 내리쬐는 8월의 햇볕에도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붉고 선명한 꽃잎과 길게 늘어진 줄기, 우아하게 드리워진 그림자까지. 그곳에는 뜨거운 햇빛과 끈적한 장마에도 아랑곳 않고 품위 있게 흔들리는 한 생명이 있다.


능소화는 덩굴로 하늘을 오르는 꽃으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마음을 상징한다고 전해진다. 꽃말은 영광, 그리움, 기다림이다. 무더운 여름에도 만개하는 강한 생명력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닮았다. 짙은 그리움을 품고 한여름의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마음이라니. 이는 기다림보다는 열렬한 고백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런 열렬한 고백을, 아니 기다림을 해본 적이 있었나. 혹은 기다림도 사랑임을 깨달은 적이 있었나.

불안하고 막막한 순간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순간에도 품위 있게 흔들렸나.

그렇게 강인하고 섬세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 삶이 저무는 순간도 담연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꽃이 피었다가 지듯,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는 당연한 순리를 받아들이면서. 생을 다한 뒤 사라지는 모든 것들 앞에 초연해지는 마음으로.


머지않아 꽃잎이 모두 떨어지고 푸른 잎과 덩굴만 남을 능소화를 상상해 본다. 그림자는 주황빛이 사그라든 후에도 길고 고요하게 담벼락 위를 흐를 것이다. 낙화를 보며 슬퍼할 나에게, 잠시 숨을 고르는 거라며 담담하게 시간과 계절을 또 한 번 머금을 것이다.

나는 가을이 와도 그 앞에 잠시 멈춰 짧게 스쳐간 여름의 숨결과 능소화의 잔향을 기억하고 싶다.





능소화는 그림자도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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