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과일은 연필로 쓰세요

by 소혜


손수 만든 달디단 복숭아잼을 빵에 발라 먹는 기분은 꽤 근사하다. 입안에는 달콤한 여름이, 귓가에는 유재하의 음악이 흐르는 오후 세시의 방안에는 썬캐쳐에 부딪힌 여름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에는 나만의 작은 카페에 들렀다. 3년째 꾸준히 찾는 그곳은 섬세하고 향미가 뛰어난 드립커피를 음악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멋진 공간이다. 듣고 싶은 노래를 종이에 적어서 내면 커피만큼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장님이 그걸 들려주신다. 선반에 넣어두었던 LP를 정성스레 꺼내는 그의 모습을 보면, ‘낭만은 구시대의 것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의 태도’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느리고 번거로운 낭만을 기꺼이, 행복하게 실현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커피의 노트는 복숭아, 재스민, 오렌지였다. 여름을 좋아한다던 그가 내려준 커피에서는 여름 과일의 향이 났다.


여름의 맛에는 그에 어울리는 음악이 필요했다. 프루티한 노트의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왠지 여름 과일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연필을 하나 꺼내 들고 나른한 더위 속 한껏 무르익은 마음을 담은 여름의 노래들을 적기 시작했다. 빈 종이는 어느덧 새콤달콤한 마음들로 빼곡해졌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문득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 진한 잉크로 쓰면 틀렸을 때 지우기 어렵지만, 연필로 쓴 사랑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흔적이 남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과연 그것이 좋은 사랑일까?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마음이 조금씩 깎여나가는 걸 감수하는 일이다. 사랑을 연필로 써야 하는 이유는 언제든 지울 수 있어서가 아니다. 쓸수록 작아지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써 내려가는 용기를 배우기 위해서다. 그래야만 여름 과일처럼 한철의 인연일지라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










‘낭만은 구시대의 것이 아니라 단단해지는 삶의 태도 같은 거죠.’

-네이버웹툰, 랑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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