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이 느린 내게 천천히 오라고 했던 사람들을 좋아하곤 했다. 사소한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자주 멈추는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준 이들. 나는 그것이 틀림없는 사랑이라 믿었고 지금도 기다림만큼 다정한 언어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가을에 태어났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을도 외로움도 잘 타지 않는다는 그와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걸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발끝에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으깨어진 은행 냄새, 뺨에 닿는 서늘하고 투명한 공기가 완연한 가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해가 짧아지면 그림자의 윤곽이 또렷해지듯 그에 대한 나의 마음도 선명한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가을의 빛처럼 둥글게 스며드는 모양으로. 그렇게 스며들다 언젠가 흩어져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질감으로. 여름내 산란해 있던 감정들이 응집되어 어느새 사랑이라는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비릿한 강물 냄새를 따라 함께 칠 킬로 남짓을 걸었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게 어느 정도 거리인지 가늠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늘 발목이 시큰거리는 정도와 주변의 풍경으로 어림잡아 짐작만 했을 뿐이니까. 벌써 칠 킬로를 같이 걸었어. 그의 말에 우리가 마치 특별한 사이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 다른 누군가와 산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어느 가을에 칠 킬로를 걸은 적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깊고 느린 산책이었다. 나보다 어른 한 걸음만큼 빠르던 그가 보폭을 맞추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문득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내 발끝을, 나는 그의 손끝을 보며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가끔 옷소매가 스칠 때마다 삼키는 말들이 늘어갔다.
돌아가야 할 지점에는 교차로가 있었다. 새빨간 신호에 멈춰 선 차들처럼 엇갈릴 걸 알면서도 그의 마음에 서성이고 싶었다. 우리 동네까지 함께 왔던 그도 조금은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는 한적하고 고운 동네가 마음에 든다며 자주 나를 데려다줘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눈을 딱 감고 용기를 내볼 걸 그랬나 하고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는데, 그 한 뼘이 왜 그리 어려웠는지.
나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가끔 그런 것이 궁금했다. 맞잡은 손에서는 어떤 애틋함이 피어올랐을지, 그의 수많은 허점과 실수를 내가 어떤 눈빛으로 품었을지, 우리는 어디까지 함께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시 한 뼘 멀어져 되돌아왔을지.
쉽게 포개지지도 지워지지도 못한 인연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쓸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와 보폭을 맞춰준 이라면 말이다. 그는 길가의 풀꽃과 오래된 벤치 앞에 자주 멈춰 셔터를 누르던 나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혼자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런 사람과는 얼마든지 함께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기억이 난다.
이제와 보면 그의 다정한 기다림을 사랑으로 읽은 것이 나의 섣부름이었나 싶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 믿으며 밀려오는 헛헛함을 달랜다. 사랑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니 이제야 당신을 이해한다고, 자주 멈춰서는 나를 다그치지 않고 묵묵히 함께 걸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이렇게라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