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돌아가기

by 소혜


늦가을의 비를 맞은 채 서점에 들어서자 서늘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날따라 한적하고 정돈된 분위기가 물기 어린 평일 저녁과 꼭 맞는 듯했다. 종종 마음이 소란하거나 답답할 때면 서점에 들러 숨을 고르곤 한다. 정성스레 고른 책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올 때, 빳빳한 종이 위에 밑줄을 긋고 모서리를 접어 둘 때 흐트러진 마음이 곧게 펴지는 것만 같다.


서점에 가면 늘 이유 없이 눈길이 머무는 책이 있는데 그날은 왠지 어떤 책에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서가를 몇 번이나 둘러보는 동안 마감 시간이 점점 다가와 마음이 조급해지던 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전부터 마음에 담아두었던 시집 한 권을 집어 들려는 순간, 책장 뒤로 넘어가 있는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주려 그것을 꺼내 들자 아름다운 표지와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랑으로 돌아가기.


사랑으로 돌아가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리움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중인 걸까. 돌아간다는 것은 이미 지나온 길을 다시 걷는 일일 텐데, 그래도 기다리는 이를 떠올리면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질까. 운명처럼 마주한 쓸쓸하고 차분한 문장들이 늦가을의 공기처럼 잔잔한 기척을 내고 있었다. 해질 무렵의 서점이 유독 포근하고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계절의 길목에서 돌아오는 누군가를 한참 기다린 적이 있다. 빛과 그림자의 길이와 살갗에 닿는 온도로 시린 틈을 실감하던 때. 그때 나는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볼멘소리를 내뱉기 바빴던 것 같다. 왜 이렇게 안 오나. 다신 기다리나 봐라. 이런 소심한 복수와 원망 없이, 그저 맑고 고운 마음만을 조용히 건네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랬다면 돌아오는 길에 무거워진 몸을 내가 조금 가볍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기다림이란 부재 속에서 선명해지는 존재를 그리워하고, 불확실 속에서 나를 돌아보는 일임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렇게 스스로가 괜히 부끄러워질 때면 나를 기다려주던 이들을 떠올린다. 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꺼지지 않던 엄마 방의 불빛을, 멀리서 오겠다는 손주를 말리면서도 마중 나와 있던 할머니의 차가워진 손을, 내 옷 위에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던 하얀 강아지를. 돌아가기 위해서는 도착이 아닌 기다림에 대해 먼저 써야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기다림이 품고 있는 애틋함과 묵묵함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고 싶다.


눈길이 닿는 모든 페이지에 빼곡한 사랑과 기다림이 있었다. 눈 오는 날 기차 안에서 이 책을 읽으며 씩씩하게 슬퍼지고 싶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떠올리며 조금만 슬퍼하다 사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부지런히 사랑하고 돌아가고 기다리다 보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짓궂은 삶도 언젠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늦가을, 사과 꽃갈피와 아름다운 책



기다림에 대해 쓰기 위해 나는 사랑을 떠올린다.
사랑에 대해 쓰기 위해 기다림을 떠올린다.


최영건, 『사랑으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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