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되는 가치 (2020.09.25)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독일에서 경험했던 내용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독일에 처음 부임했을 당시 그리스, 스페인, 이태리 경제 위기로 당시 유럽 법인은 손익이 마이너스인 법인이었습니다. 거기에 전해 퇴사율은 45%가 될 정도로 절반 가까이 퇴사하여 이를 충원해 달라는 요구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마케팅 부서에 새로운 업무가 부여되어 현지 독일인 팀장이 강력하게 충원 요청하며 자주 면담하였습니다. 평소 주재원이나 현지 팀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고 마케팅 부서에서 그 팀장 때문에 퇴사했다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지만 부임 초기이기에 편견 없이 직접 의견을 듣고 필요한 사항은 지원해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손익이 안 좋거나 팀원 관리 미숙한 리더십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 시간 이후에 찾아온 마케팅 팀장이 또 충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최대한 지원하려 하나 여러 어려운 상황들이 있다고 일단 새로운 업무를 현재 인원으로 시작하고 채용은 계속 검토해서 지원하겠다고 커뮤니케이션하였습니다. 또한, 현재 근무 중인 팀원들의 리텐션도 신경 쓰면서 진행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분이 HR이 사람을 안 뽑아주니 그냥 나는 그 업무를 안 하겠다고 법인장에게 통보하겠다고 하고 나가 버렸습니다. 물론 법인장님에게 그전부터 마케팅팀과 그 팀장의 문제점과 현재 인원 충원 어려움 등을 여러 번 보고하고 공유드렸기에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거꾸로 그 팀장이 법인장에게 완전히 찍히는 계기가 되었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가장 우려스러웠고, 가장 크게 실망했던 점은 과연 저 팀장을 그대로 역할을 주어야 하는 건가였습니다.
얼만 전 우리 팀이 진행했던 캠페인 중 ‘너네 일이 아니고 우리 일‘이라는 문구에 대한 불평이 많았습니다. R&R이 제대로 안 서있는 게 문제지, 저걸 또 다 우리 일이라고 캠페인 해서 그냥 일을 떠안게 만드냐는 불만이었을 겁니다. 당연히 R&R도 중요하고, 회사라면 계속 개선하고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맞겠지요. 그런데 인생에서 모든 게 제대로 세팅되어 시작되는 게 있을까요? 아무리 큰 회사라도 말입니다.
인력, 예산, 사업환경이 충분히 지원되고 R&R이 완벽하게 정해지고 프로세스도 이미 구축되어 있어 시스템 대로 움직이는 회사를 만드는 것에 대한 노력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되는 가치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일을 미루지 말고 우리 일로 여기고 일해야 하는 것, 한정된 자원으로 충분한 지원을 지금은 못 받더라도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 결국 다시 제대로 된 지원 시스템, 명확한 업무 권한과 책임에 대한 정리를 추진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물론 회사가 충분한 지원을 할 생각도 없고, R&R 정리할 생각도 없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바꿔주기를 기대하기보다 본인이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그 정도 노력도 할 가치가 없는 회사라면 더 이상 다니지 말고 새로운 회사를 찾아보는 것이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나은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삶에서 많은 것이 갖추어져 있기를 바랍니다. 부유한 가정, 완벽한 신체,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 급여도 많이 주고 자기 성장이 가능하면서도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받지 않는 직장 같은 것 말입니다. 저런 것들만 있으면 더 잘 살 텐데 라는 상상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주도라는 것은 여러 제한된 상황, 악조건 상황에서 해보려는 마음, 실천하는 자세라는 생각도 합니다. 또한 진정한 협업은 결국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주도적으로 채우려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이 글을 쓰고 퇴고하면서 혹시 내가 나이 들어서 꼰대 같은 생각으로 변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은 불평대로 하면서, 동시에 또 자신이 주도적으로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는데 그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 건지 생각도 해 봅니다. 어쨌든 불만 표출이 그저 단순한 부정적인 감정 소모를 넘어 다른 에너지로 전환되어 변화를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회사를 바꾸는 변화던, 본인이 회사를 바꾸는 변화던 어떤 변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