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부터의 해방, 오직 '현재'의 시간
한 달 간의 유럽 여행을 떠나고 온 뒤 선물처럼 이 책을 만났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떠나지 않았던 나의 28일간의 여행에서 그저 행복하고 기뻤던 것만은 아닌지, 무언가 얻은 바가 없어서 아쉬워야 해는 것은 아닌지 이상한 걱정도 있었는데 이 책을 계기로 그런 생각은 가질 필요조차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내가 맞닿은 현재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돌아왔고 그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는 볼 수 없던 생경한 도시 풍경과 자연 경관에 감탄을 하고 해사하게 웃고 기뻐할 수 있었던 그 날들이 지금의 나를 또 살게 하는 것 같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 없이 오직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내 여행이 지금 무엇보다 값지게 느껴진다.
일상이 부재한 나의 그 여행을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일상 속 내 또 다른 여행은 공연인 듯도 하다. 일상이 부재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 대신 단지 내 앞에 펼쳐진 무대 위 ‘지금’의 세상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그 순간이 내게는 여행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p. 24.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p. 51.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 63.
인생은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어떤 허깨비와 싸우는 것일지도. 그게 뭔지도 모르는 채로.
p. 81.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라는 주체가 있지만, 그 주체를 초월하는 생생한 현재가 바로 눈앞에 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원경으로 물러난다. 범속한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p. 82.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p. 109.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p. 110.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