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일기
슈베르트의 피아노 걸작으로 뽑히는 <방랑자 환상곡>은 슈베르트 작품 중 가장 크고 기교가 화려한 곡이다. 네 개의 악장에 걸쳐 단일 주제가 순환 형식으로 배치되는데, 이는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하나의 형식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곡 제목이 판타지(환상곡)이다.
형식적으로 완벽히 정의되지도 못하는 곡이, 슈베르트 일생의 작품 중에서, 그리고 낭만음악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원래, 반항은 부스럭대는 법이다. 풋어른의 말대꾸는 어른의 것보다 정신없고, 어린 마음에는 작은 소용돌이가 태풍이 되어 소리를 낸다.
이 곡을 작곡한 1822년, 슈베르트는 25살이었다. 마침 동갑이다. 이십대 중반의 문턱에서 얼마나 고민이 많았으랴. 슈베르트와 나는 시대를 넘어 미성숙한 과도기를 공유한다. 이해한다.
방랑자 환상곡은 그렇게 애매하고 분리되기 어려운 시기에 등장한 녀석이었다. 나 또한 무엇이라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애매한 시기에 이 곡을 공부했다. 연습하면 할수록 지쳐갔다. 정의되지 못한 무언가를 소비하는 것은 마치 여러 번 쥐어도 모양이 잡히지 않는 물컹한 것과 맞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컹한 것은 그냥 나였다. 내가 나를 아무리 쥐고 주물러도, 모양이 잡히지 않았다. 슈베르트는 이 곡을 작곡할 때 곡을 이리저리 주물러봤을 것이다. 1악장에 바람을 넣고 2악장에 온도를 높여, 3악장에 마구 흔들고 4악장에 터뜨리는 것은 그의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도 나를, 그렇게 주물러본다.
지금은 한 2악장 쯤, 바람을 넣어 팽팽한 것은 나름의 안정감이 들지만, 스며드는 따뜻한 온도는 이질적이다. 왼손과 오른손의 온도가 다르면 어쩌자는 말인가. 양손을 힘껏 주물러 온도를 맞춘다.
방랑자 환상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소나타들과는 다르게 네 개의 악장이 끊기지 않고 한숨에 연결된다. 각각은 같은 주제를 공유함으로써 결집된다. 사실, 주제는 단순하다. 그 주제로 25분이 넘도록 이리저리 모양을 잡아내니, 역시 내 친구는 대단하다.
네 개의 악장이 끊임 없이 흐른다는 것은, 말하자면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4악장으로 갈수록 숨은 가빠온다. 앞의 실수들이 눈에 밟히다가도, 그 순간에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한다. 음악은 진행되는 것이고, 멈추지 않는다. 과거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도, 미래의 소리를 미리 들을 수도 없고, 연주되는 오직 지금의 소리가 흘러갈 뿐이다. 눈앞이 깜깜하더라도, 뒤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지나간 것들은 잊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휘몰아친 후에는 결국 후회가 남는다.
한숨에, 단숨에 휘리릭 살고 나면 남는 것이 후회 뿐이라면 어쩌지, 생각하곤 한다. 25분의 연주 뒤에도 후회가 산더미인데, 인생의 후회는 얼마나 큰 산을 이루어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낼까.
더 잘 해볼 걸.
방랑자 환상곡을 쳐내는 것은 무섭고, 삶을 살아내는 것도 무섭다.
격동의 25살, 그 중반을 힘겹게 넘어가는 슈베르트의 환상이 보인다.
방랑자 환상곡은 곧 그의 청춘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