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기억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끝은 예고 없이 빠르게도 찾아오고, 시작은 고통스러운 마음을 인내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긴 시간의 간극을 타고, 멀리 날아 볼 속셈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나 혼자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끝을 축하하며, 그럴 새도 없이 시작을 고민하며...
어릴 때는 정말이지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학교에 다녀와 간식을 먹고, 아버지를 기다려 저녁을 먹기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1분이 1시간 같습니다. 그때는 1분, 또 1분을 곱씹으며, 시계 초침을 따라가며 살았더랬습니다.
지금은 1분은커녕 하루가 훅훅 지나갑니다. 눈 떠보면 주말이고, 숨 한 번 내쉬었다 하면 계절이 변해있고, 글씨 한 자를 겨우 쓴 것 같은데 1년이 훌쩍입니다. 시간이 나몰라라 가 버리는 것은 세월로 얻어 낸 메달입니다.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비슷해질수록 시간의 감각을 잃어 간다나요. 아뿔싸!
여행 첫날은 해가 쨍쨍입니다. 어딜 가도 모든 세상의 피조물들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모든 반찬을 만끽하는 것은 우쭐할 만합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습니다. 배차 간격이 서너 시간인 버스 시간을 맞추어 타는 것은 마치 굴러가는 훌라후프에 몸을 던져 통과시킨 것 마냥 뿌듯합니다. 걷고 또 걸으며, 세상의 것들을 탐닉한 날이었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들을 골라 나에게 건넸습니다. 나를 먹이고, 배불렸습니다.
여행 둘째 날은 비가 흩날립니다. 어딜 가도 미적지근합니다. 오늘은 비를 바라보며 나를 평온으로 이끌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고 보니, 책 한 권을 가져왔지만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카페를 찾아, 음료와 당근케이크를 시킵니다. 책을 펼칩니다. 나를 빼놓고는 손님들이 모두 바뀝니다. 딱 자기만큼의 시간을 소비하고 가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시간 속에 내가 하나의 배경이 되어 머물렀음에 감사합니다. 사람의 덫에서,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음은 감사할 일입니다.
까만 글자들에 혼미해져 갈 때쯤, 눈앞에 한 남매가 보입니다. 누나와 남동생은 세 살 차이로 보입니다. 나와 내 동생이 그랬듯. 남동생은 누나를 놀래키고, 수도 없이 장난을 걸어댑니다. 근데, 자기가 더 재밌습니다. 깔깔대며 웃습니다. 우리 동생도 그랬습니다. 별명이 '누나 복사기'였습니다.
우리가 함께 장난치며 놀던 순간을, 잠깐이라도 좋으니 보고 싶습니다. 그때는 몰랐던 그 아름답고 때 묻지 않은 순간들을 보고 싶습니다. 미소 짓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축복입니다.
엄마아빠가 싸울 때 동생과 이룬 무언의 단합을,
함께 씻을 때의 규칙을,
엄마의 생일파티를 준비하며 오카리나 불던 때를,
이불 위에서 했던 낙법과 앞구르기를
기억하며,
그 기억들이 있기에, 나는 지금 이리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