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로 태어난 아이

내가 사라질수록, 너는 웃기 시작했다

by 디바인힐러


그 아이는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아주 작은 지우개 조각이었다. 너무 작고 희미해서, 누구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존재였다.


연필통 한 켠, 낡고 마모되어 잊힌 자리에서 조용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눈물이 그 위에 떨어졌을 때였다.


그 조각은 떨리듯 작게 흔들리며, 작은 심장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너의 아픔을 대신 지우러 온 아이야.”


지우개 아이는 말을 아끼고, 대신 손끝으로 마음을 전했다.
자식을 잃고 눈물로 새벽을 지새운 어머니의 손,
스트레스로 굳어버린 아버지의 눈빛,
병원 대기실에서 떨리는 아이의 어깨 위에도.


친구의 눈가에 맺힌 눈물,
어른의 마음속 깊이 박힌 후회,
교실 구석의 낙서처럼 남겨진 상처들.


아이의 손끝이 닿는 순간마다, 슬픔은 조용히 지워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작아졌다.
목소리는 바람 속 숨결처럼 가늘어졌고,
그림자는 햇살 아래 먼지처럼 희미해졌다.


“왜 작아지냐고 묻지 마.
나는 너를 웃게 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어느 날, 아이는 학교 창고에서 울고 있는 또 다른 아이를 만났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스스로를 지우고 싶어 하던 아이였다.


“내가 사라지면, 다 괜찮아질까?”


지우개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라져야 할 건 네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말이야.”


그리고 아이는 조심스럽게 그 아이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가장 깊이 아팠던 기억, 가장 두려웠던 순간, 가장 작아졌던 마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아이의 손은 점점 더 투명해졌다.
그리고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작아졌다.



세상은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을 품기 시작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이 자신도 모르게 지워지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며.


“그 아이, 손끝이 참 따뜻했어요.”
“그 아이… 내 울음을 가져갔어요.”



지우개 아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병원의 창가였다.
햇살을 가만히 받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나도… 지워질 수 있을까?”
할머니가 나직이 물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숨결처럼 가볍고 단단했다.
“아니요. 당신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어요.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는 마지막으로,
할머니 가슴 깊이 오래도록 묻혀 있던 한 조각의 슬픔을 조용히 지워주었다.


그 순간, 아이는 가장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바람처럼, 빛처럼, 아주 조용히.


다음 날 아침, 세상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학교의 낡은 복도,
병원의 희미한 벽지,
놀이터의 외진 그늘마다
작고 순한 하얀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그 제비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슬픔을 물고 날아가고, 마음을 어루만지며, 다시 웃음을 불러오는 작은 제비였다.


하얀 제비꽃은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꽃은 해마다 기억의 씨앗을 퍼뜨렸고, 그 씨앗은 더 많은 하얀 제비꽃으로 피어났다.

그렇게 제비꽃은 마음속에 남은 기억들을 따라 다시 피어나며, 세상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 꽃들은 더 많은 웃음과 더 깊은 위로를 품은 채, 세상을 조용히 물들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그 꽃 앞에 멈춰 섰다.
마치 누군가가 자기 마음을 다정히 쓰다듬은 것처럼.


그 꽃잎 위엔


단 하나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지워졌지만, 너는 웃었으니… 그걸로 충분해.”


이름 없던 아이. 그러나 모두의 기억 속에 남은 존재.


사라진다는 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속에 조용히 피어나는 것.


지우개로 태어난 아이는 그렇게,
하얀 제비꽃이 되어
세상의 눈물 자리를 웃음으로 바꾸고,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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