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의 하루에 아주 조용한 온기가 머물기를 바랬어
그 아이는 세상의 속도에서 비껴 난 듯 태어났다.
시간은 그에게서 흘러나왔고, 조용히 사람들 곁에 머물렀다.
그 아이는 '시간'을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흘러 들어갔다.
바쁜 걸음, 지친 눈, 말 없는 식탁.
그 아이는 그런 순간을 찾아가
고요를 꺼내고, 여백을 꺼내고, 숨을 꺼내주었다.
엄마의 굳은 어깨 위에 쌓인 분주함을 걷어내고,
혼자 남은 친구의 공허한 하루에서
말없이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꺼냈다.
불 꺼진 골목에서 떨고 있던 작은 존재에게는
공포 대신 고요한 밤의 숨을 건넸다.
그 시간 동안 누군가는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이의 주머니엔 반짝이는 시간 조각들이 있었다.
뒤늦은 등굣길엔 다정한 발걸음을,
무거운 출근길엔 잠깐의 여유를 꺼내어 놓았다.
불이 꺼진 병실 안에선
아이를 위해 한낮의 햇살처럼 따뜻한 시간을 펴주었다.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오늘이 어쩐지 덜 차갑게 느껴졌다는 이유를.
그리고 그 이유를 아는 이는
단 한 명, 그 아이뿐이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무거워졌다.
사람들은 얼굴보다 화면을 먼저 바라보았고,
한 손엔 뗄 수 없는 분신이 된 휴대폰 화면이 있었다.
식탁 위엔 말 대신 파란빛이 앉았다.
하루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창밖처럼,
스쳐가는 풍경처럼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그 틈에서 아이는 점점 투명해졌다.
하루는 알림음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그 틈에서 아이는 점점 투명해졌다.
너무 많은 시간을 꺼낸 탓이었다.
몸에서 빛나는 선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그림자는 엷어졌으며, 눈빛은 조용히 멀어졌다.
“괜찮아?” 누군가 물었을 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로봇처럼 굳어가는 세상 속에서
누군가의 하루에 눈빛 하나라도 오래 머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날 밤, 아이는 마지막 시간을 꺼냈다.
도시의 모퉁이에서,
말없이 눈물 흘리던 엄마에게는
포근한 저녁노을 같은 쉼을,
차가운 바닥 위에 웅크린 노인에겐
잠시 잊을 수 있는 따스한 틈을 건넸다.
그리고 아이는 멈췄다.
더는 꺼낼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세상은 처음으로
조금 천천히 걸어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음 날,
버스는 천천히 출발했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식탁에선 눈을 맞추며 밥을 먹는 이들이 생겼고,
놀이터에선 웃음이 좀 더 길게 퍼졌고,
카페엔 말없는 따뜻함이 머물렀다.
그리고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에서
하얀 시곗바늘처럼 생긴 작은 싹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그 곁에는 손글씨로 쓰인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너무 빨리 사라지는 하루에
조금 더 따뜻한 순간이 남길 바랬어.”
이 세상에는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하루를 조용히 건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