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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 할아버지도 인정했다던 뭐가 돼도 될 셋째 딸

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by 황갑연


빗자루로 마당을 쓱싹쓱싹 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버지는 초하루나 보름이면 새벽 네다섯 시쯤 일어나 마당을 깨끗이 쓸었다. 마당을 다 쓸고 나면 부정스러운 물건이 남아 있을까 봐 마당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보셨다. 아버지는 전날 밤 짚으로 새끼줄을 꼬아 하얀 소지와 소나무 입을 끼우는 그믐줄 작업을 해 놓았다.


싸리나무로 만든 대문을 활짝 열고서 양쪽에 세워진 장대에 전날 만들어 놓은 그믐줄을 치셨다. 그믐줄을 치는 이유는 집안에 부정이 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혹여 이웃집에 궂은일들 (주검을 치우거나 장례를 치르는 일)을 치른 사람들이 들어오면 안 된다는 표시를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간밤에 두세 번은 일어났던 것 같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사랑방에서 잠을 잔다. 할머니는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라고 밤마다 나의 단잠을 깨운다. 기절한 듯 잠을 자다가 일어나 비몽사몽 눈을 감은 채 물을 주었다. 방바닥에 물이 주르륵 흘러 이불이 젖는 날도 많았다. 걷지 못했던 할머니는 앉은키보다 높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기가 힘드셨다.


시간을 맞추어 콩나물에 물을 주지 않으면 잔발이 나오고 질기다며 밤마다 나를 두세 번 깨우셨다. 귀찮고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다. 내가 잠을 푹 자지 못하고 정성스레 키운 콩나물은 오늘 산신제를 올릴 때 쓴다고 했다.


엄마는 전날 큰집 방앗간에서 디딜방아에 불린 쌀을 넣어 보드랍게 찌어 놓았다. 머리에 하얀 수건과 삼베 앞치마를 두른 엄마는 가마솥에 물을 붓고 그 위에 시루를 올린 뒤 전날 빻아놓은 쌀가루를 넣고 손바닥으로 골고루 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쌀가루 위에 물에 적신 삼베천을 덮고 통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시루 틈 사이로 김이 새어 나오지 않게 밀가루 반죽으로 꼼꼼히 발랐다. 아궁이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고 시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올 때면 맛있는 백설기 떡 냄새가 났다. 하얀 백설기 떡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엄마가 먹으라고 주기 전에는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했다.


산신제를 지내는 날에는 모든 행동과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부정이라도 타면 몸이 아프고 집안에 나뿐 일들이 생긴다고 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하며 왜 그런 것을 믿냐고 하겠지만, 그 시절 우리 집은 산신 할아버지와 조상을 섬기는 유교 사상이 강했다.


엄마는 내가 며칠 밤을 설치며 키운 콩나물을 참기름과 깨를 듬뿍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우리 집 부엌은 백설기 떡 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입안에 침이 한가득 고여 몰래 먹을까 나쁜 생각도 했지만 부정이라도 탈까 두려워 꾹꾹 참았다.


밤 12시에 산신제를 올린다고 했다.


산신각은 우리 집에서 1시간쯤 걸어서 가야 한다. 밤 11시쯤이면 낮에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들을 두 개의 빨간 대야에 나누어 담았다. 음식이 담긴 대야 하나를 아버지는 지게에 싣고, 엄마는 머리에 이고 후레시에 의지하며 꾸불꾸불 몇 고개의 산을 넘었다. 전래동화 속 얘기 같았다.


산신각에 도착하면 아버지는 산신각 문을 열기 전 헛기침을 몇 번 하셨다. 아버지는 평상시 화장실 입구에서도 헛기침을 하고서 들어가셨다. 신들에 대한 예의로(들어갑니다. 놀라지 마세요) 알려야 한다고 했다. 산신각 문을 열면 하얀 도포를 입은 산신할아버지가 백발의 긴 머리를 느려 트리고 도사님들이 집고 다니는 키보다 높은 꽈배기 모양의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집고 있었고 왼쪽 옆에는 눈이 부리부리한 호랑이가 산신할아버지와 나란히 서있는 탱화그림이 있었다.


나는 산신각이 무서워서 혼자서는 문을 열지도 근처에 가지도 않으려 했다. 아버지와 주변사람들의 말씀으로 죄를 짓거나 부정을 타면 바로 표시로 코피가 터진다고 했다. 나는 옆집 감홍시를 몰래 따먹었을 때, 앉은뱅이 할머니 심부름을 하지 않았을 때, 엄마 주머니에 돈을 훔쳤을 때 산신할아버지께 벌을 받아 코피가 터질까 두려워 밤잠을 설쳤다. 이불속에서 누워 두 손을 깍지 끼고 "할아버지요 잘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겠습니다. 코피 안 터지게 해 주세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부모님은 상단에 낮에 정성스레 준비한 하얀 쌀밥 탕국 떡 나물 술 과일 등을 차려 놓았다. 두 개의 촛대에 꽂힌 초에 불을 부친뒤 향을 피웠다. 세 번의 절을 하시고 무릎을 꿇고 안은 두 분은 두 손을 모아 비비며 입으로 중얼중얼 무언가 소원을 비는 것 같았다.


"산신 할아버지요 산신 할아버지요 우리 가족 모두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해 주세요. 올 한 해도 풍년 들게 해 주세요. 우리 얘들 잘되게 앞길 보살펴 주세요"라며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난 뒤 아버지는 가족들의 이름이 적힌 소지에 불을 붙이고 하늘 위로 한 장씩 띄워 올렸다.


하늘 위로 올라가는 소지를 보며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하 ~~ 야가 커서 뭐가 돼도 되겠는데 산신 할아버지도 인정을 하여 표시를 주시네"


주역책에 보면 3000년 전 갑골점을 쳤다. (거북이의 등껍질을 이용해서 길과 흉을 점치는 방법)


우리 부모님은 이름이 적힌 소지로 산신 할아버지가 그 사람의 운명을 알려 준다는 점술을 믿었다.


5남매 중 나의 이름이 적힌 소지가 하늘 높이 잘 올라갔다고 했다. 다른 가족들의 소지는 올라가다 떨어지기도 하고 불을 붙였는데 금방 꺼지기도 하였다고 했다. 이름이 적힌 소지가 활활 타며 하늘 높이 잘 올라간다는 것은 앞길이 잘 풀리고 무언가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된다는 암시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산신 할아버지를 향한 믿음이었는지 나의 대한 기대였는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연이를 잘 키워야 할 텐데, 딸로 태어났지만 사내아이 못지않은 배짱도 있고 사주도 잘 타고났다. 연이가 태어나며 복을 가지고 왔는지 살림도 많이 늘고 좋은 일이 많은데, 일찍 집을 떠나면 복을 가지고 나가니 오래도록 데리고 살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70년 세대를 살아온 친구들과 언니 오빠는 하얀 쌀밥을 양껏 먹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보리밥에 갱생이 죽이 꼴도 보기 싫었다고 했다. 나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사주가 좋아서인지 돈도 먹을 것도 부족한 것 없이 누리고 살았다. 해마다 두 마리의 소가 수송아지를 낳았고 백 그루의 사과나무는 병충해 없이 빨간 색깔을 띠며 주렁주렁 열렸다. 다랭이 논의 벼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매상을 내었고 누에고치가 특급을 받아 농협에서 저축상 까지 탔다.


암송아지 보다 돈이 되었던 수송아지를 파는 날이면 아버지는 대청마루에서 백만 원이나 되는 돈다발을 나에게 세어 보라 하시며 뿌듯해하셨다. 잿밥에 관심이 많았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신 듯 아버지는 돈다발에서 만 원짜리 두장을 빼 주시며 말씀하셨다.


"낼 친구들하고 맛난 것 사 먹어라. 이 정도면 대장 노릇 할 수 있겠지"


아버지의 믿음과 사랑으로 자존감이 높았던 나는 학창 시절에 골목대장이 되어 친구들을 몰고 다녔고 성인이 된 지금도 모임을 이끄는 리더를 하고 있다. 아버지~오늘따라 많이 그립습니다.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나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철없는 사랑에 빠져 일찍 집을 떠나게 되었다.


미신이라 하기에 우연의 일치였다.


내가 집을 떠난 뒤 집안이 어둡고 좋은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고 했다. 매해 풍년이 들던 벼농사도 흉년이 들었고 수송아지가 암송아지로 둔갑을 하여 돈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빨갛고 탐스럽던 사과는 병이 들어 인건비도 못한 체 빚만 늘었다고 했다. 아버지 가업을 이어가던 오빠와 올케 언니는 더 이상 비전이 없는 농사일을 접고 도시로 떠났다.


믿어야 하나 싶지만 아버지 말씀대로 예지처럼 우리 집은 서서히 망해가고 있었다.


아들 귀하던 시절 외아들 장손이었던 오빠를 인정하지 않던 아버지는 훗날 본인의 초상을 치를 때 오빠는 상주로 서지 않을 거라 하셨다.


성격이 소심한 큰언니를 보며 당당하지 못하고 속앓이로 자주 눈물을 보이니 화병으로 자기 명을 다 이어갈지 걱정이라 하셨다.


둘째 언니에 대한 말은 아껴야 한다. 아버지 말씀으로 둘째 언니는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하셨다.


막내 여동생은 초년에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든 고비를 넘으면 말년에 대운이 들어 행복한 삶을 살 것이며 지극한 효심으로 효녀 효부가 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예지 같은 말씀은 퍼즐처럼 맞아 들어갔다.


7년 전 아버지 초상을 치를 때 오빠는 끝내 오지 않았다. 지혜가 부족하고 욕심이 많던 오빠는 부모님의 유산을 딸들인 우리들 모르게 증여를 받은 뒤 조용히 사라졌다. 소심하고 눈물이 많던 큰언니는 imf 힘든 시기에 나약함의 극치로 자살을 선택했다. 그때 큰언니 나이가 35살이었다. 이해와 타협이 아닌 자기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작은 언니도 부모 형제와 연을 끊고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다. 하나뿐인 동생 자야는 가까운 이의 배신으로 죽을 만큼 우울한 날을 지나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아버지 말씀대로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을 지극히 섬기는 효녀 효부라 말하고 싶은 자랑스러운 동생이다. 그날 임종을 앞둔 아버지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연아 내가 덕이 부족하여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 너의 동생 자야와 함께 나의 장례식을 부탁한다. 그리고 내가 없는 세상 혼자 남은 엄마도 부탁한다. 나의 딸로 와서 유일한 말벗이 되어 주어서 고맙고 마음으로 너를 많이 의지하며 살았단다. 미안하고 고맙다. 너의 훗날은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이 될 것이다. 동생 자야와 의좋게 지내길 바란다"라고 하셨다.


5남매 중 유일한 동생 자야와 나는 서로를 의지하며 아버지 유언을 받아 엄마의 테두리가 되어드리려 노력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50의 중반을 넘은 나는 아버지 말씀처럼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누구보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남편과 부모님을 존경한다는 최고의 극찬을 해주는 두 아들이 결혼을 하여 맞이한 예쁜 두 며느리도 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주변사람들은 이만 하면 성공했다고 더 이상 바라면 욕심이라고들 한다. 산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예지 믿음에 내가 원하는 뭐가 돼도 되어야 하는 무언가를 찾아 나는 오늘도 헤매고 있다. 나의 아버지처럼 나를 항상 응원해 주며 외조를 아끼지 않는 남편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이 바라는 뭐가 돼도 되어야 하는 기준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야?"


나는 대답했다.


"어~~아직은 부족한 나의 글이 베스트가 되어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 아버지의 예지를 물려받아 조금은 남다른 사주 풀이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 동양 철학과 학사모를 쓰고 평생 교육원 사주 명리학 교수가 되면 더 좋겠지요"


나의 대답처럼 가능성은 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이고, 사주 명리학 상담사이다.

산신 할아버지가 인정하였고 아버지 예지 말씀처럼 뭐가 돼도 될 셋째 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날 유일하게 훨훨 하늘 높이 타올라가던 소지로 치면 지금쯤 3분의 1 높이에 도달한 것 같다. 아직 남은 3분의 2에 해당하는 내 인생이 너무나 기대된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만큼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글을 써나갈 것이다.




KakaoTalk_20250121_111009476.jpg 산신각 외부 모습


KakaoTalk_20250121_110941409.jpg 산신각에 대한 설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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