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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을 가진 친정 엄마 2

by 황갑연

나도 지금 아이들 다 키워본 입장에서 이해는 한다. 하지만 칼에 온몸이 베인 것 마냥 마음이 찢어져 있는 그 당시의 나에게 꼭 그렇게 퍼부어야 했을까. 본인이 답답한 마음을 꼭 그때 그 순간에 내 귀에 들리게 해야 했을까?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본인을 위해서겠지. 그 순간 퍼붓지 않으면 화병에 걸릴 것 같으셨겠지. 그렇게 하고 싶은 말씀 항상 하고 사셨으니 아흔이 다 되어가는 지금 화병은 전혀 없어 보이신다. 그나마 다행이다. 화병으로 병간호해 드릴 일은 없으니.



엄마는 나를 한동안 미워했다. 철없던 18살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져 학교도 부모님도 뿌리쳤다. 드라마 속 어느 주인공처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래도 내 사랑은 굳건했다. 시골집에서 도망 나와 부산으로 도망쳤다. 일주일 만에 부산에 사시는 막내 삼촌에게 잡혔다. 삼촌집에 감금되어 숙모의 감시를 받으며 삼촌의 휴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부모님은 안동에서 내려오기 힘드시니 삼촌이 쉬는 날 나를 데리고 올라갈 작정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반드시 탈출해야 했다. 숙모가 잠시 시장에 간 사이 나는 맨발로 창문을 너머 다시 도망갔다. 그 후로 나는 완벽한 출가외인이 되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내 첫사랑, 내 남편. 지금 마취기운으로 편하게 자고 있는 그 사람. 어쩌면 오늘 사고로 운이 더 나빴다면 그 사람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뻔했다. 속상한 엄마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나보다 더 속상하겠는가?


'그래. 엄마는 항상 그랬지. 내가 뭘 더 바라.'


어떠한 상황 (내가 사랑에 미쳐 도망 다니던 그런 상황)에서도 변명을 들어주셨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는데, 사사건건 내 의사는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모진 말만 하셨던 엄마 때문에 반항심과 열등감도 함께 쌓였다.


난 더 이상 엄마와 통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엄마와 통화가 끝난 뒤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은 쿵쾅쿵쾅 뛰며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 되어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긴 한숨을 내뱉으며 병실로 돌아가려 몸을 일으켰다. 힘 풀린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천천히 발검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남편의 고함이 들렸다. 진통제 약발이 떨어진 것이다. 아픔을 호소하는 그의 소리를 듣는 순간 육상선수처럼 달렸다.




다음날 아침 7시 남편은 수술실에 들어갔다.

난 수술실 앞 의자에 혼자 앉아 긴 한숨을 수없이 내뱉으며 멍하니 복도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


친정 오빠가 왔다. 첫 가족 방문이다. 오빠와 눈이 마주친 나는 서러움에 복받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오빠와 함께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 남편의 사고 경위, 집에 있는 두 아이들 걱정 등 많은 얘기를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렸을까?


침대에 실린 채 수술실에서 나온 남편은 마취가 풀리지 않은 듯 편안히 자고 있었다.

오빠와 나는 남편이 실려가는 침대를 따라 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남편이 마취에서 깨어나 아픔을 호소할 때쯤 작은 언니와 여동생이 병실로 들어왔다.


동생은 들고 온 음료수 박스를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나에게 말없이 봉투 두 개를 건네주었다. 하나는 언니 것, 하나는 동생것이었다.


두 사람은 보호자용 간의 침대에 나란히 앉아 남편의 사고 경위를 들은뒤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병실로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다. 내 친구가 병문안을 와도 이것보다는 더 오래 있었을 거다. 실제로 그랬다.



오빠는 나를 혼자 두고 가기가 마음에 걸렸는지 그날밤 복도에 놓여있는 의자에서 쪽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부모님이 전해주라는 돈과 본인 돈봉투와 함께 전해주고 돌아갔다.


엄마 아빠 10, 오빠 10, 동생 10, 언니 10. 총 40만 원이었다. 20년 전이니 지금 물가로 치면 대략 60만 원이다. 예전에 가족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내가 해준 것에 비하면 한참 낮은 금액이었다. 그들의 어려움도 작지는 않았지만 그때 내가 겪었던 어려움은 (만약 대회가 있다면) 무조건 1등이다.



우리 친정 식구들이 원래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다.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다시 한번 깨달으니 마음이 아팠다. 결혼식 축의금 같은 돈봉투만 쥐어주고 이웃집 병문안 오듯 음료수 한 박스 남겨두고 그렇게 훌쩍 떠났다.


오지랖이 워낙 커서 우리 친정집에서 나는 항상 돌연변이 취급을 당했다.


"개뿔도 없는 게 뭐 그렇게 나서서 도와주냐! 쓸데없이 통만 커서.. 쯧쯧쯧."


그 오지랖은 나는 줄곧 내 가족들에게 부리며 살았다. 물론 대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때 내가 원한 건 '대가'가 아니라 '도움'이었다. 불우이웃한테 가지는 동정심, 또는 지나가다 불이 나면 119에 신고해 주는 정도의 관심이면 됐다. 그래도 나는 가족이니깐 조금 더 길게 내 옆에 있어주고. 물론 입맛이 없어 밥은 안 넘어갔지만 내게 억지로라도 먹으라며 밥 한 숟갈 떠먹여 주는 그런 손길이 필요했다. 잠시 내가 강서방 볼 테니 너는 목욕탕이라도 다녀와라.라는 정도의 아량이면 됐다.


그 후로 일 년간 병원에서 남편 병수발한 사람은 끝까지 나 혼자였다. 친정 식구들께 섭섭함이 밀려왔던 그날 아후로 나의 마음에는 혼자라는 외로움과 냉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시시때때로 모진 말을 퍼부으시는 엄마(그러면서 한 번 찾아오지도 않았던)에 대한 원망은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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