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공의 상징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은 몰고 온 차나, 메고 온 가방 자랑을 하기 바쁘다. 나는 얼마 전 수확한 채소들 이름을 나열하느라 바쁘다.
사전에서 텃밭의 뜻을 찾아보았다.
1. 집 가까이 있거나
2. 집터에 붙어 있는
밭이다.
내 채소들이 자라는 텃밭은 2번, '집터에 붙어 있는' 공간이다. 10년 전 인감도장을 찍었다. 그날 이후로 3층짜리 꼬마빌딩 건물주가 되었다. 그 건물 옥상에 만든 밭이다.
3층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계절마다 다른 풀 내음이 난다. 오이, 상추, 고추, 가지, 토마토, 부추, 대파 같은 채소들 잎에서 나는 냄새와 라일락, 작약, 도라지, 코스모스, 해바라기 같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의 향기가 섞여 내 코를 즐겁게 한다.
나란히 줄지어 놓여있는 화분을 따라 열 걸음 정도 걸으면 빨랫줄이 나온다. 햇볕과 바람에 말린 빨래는 재질에 따라 보송보송하기도 하고 까슬까슬하기도 하다. 빨랫줄을 걸기 위해 설치한 막대의 윗부분에는 오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빨랫대 사이에 심어 놓은 모종이 자라서 빨래 지지대를 타고 올라간 것이다. 매달린 오이들을 보고 있으면 서커스 단원들의 곡예가 떠올라 나는 그곳을 오이들의 서커스장이라 부른다. 빨래를 널고 걷으러 올 때마다, 나는 오이 서커스 관람객이 된다.
몸을 돌려 서쪽으로 걸어가면 창고가 있다. 창고 문을 열 일은 잘 없다. 창고 처마 밑 공간에 볼일이 많다.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다닥다닥 붙어 그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안에는 각종 장류와 장아찌, 그리고 소금을 담아 놓았다. 우리 집 식탁의 기본 맛을 책임지는 귀중한 것들이다. 우리 집에 도둑이 들면 현금은 가져가도 되는데 항아리는 절대 안 된다. 물론, 도둑이 항아리를 탐낼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혼자서 킥킥대곤 한다.
시골 친정집 마당 옆 텃밭에는 다양한 채소들이 그득했었고 울타리 사이에 봉숭아, 맨드라미, 야생화 꽃들이 정겹게 피어 있었다. 수돗가 옆 장독대에 기대어 늘어진 빨랫대들은 어찌 그리 잘 버텼는지 아직도 미스터리다. 넘어질 것 같이 휘청이다가도 바로 일어서는 오뚝이 같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있다. 내 옥상에 그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 놓으려고 한다.
빨갛게 물든 고추 수확이 끝나면 고춧대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배추 60 포기와 무를 심는다. 잘 자란 무는 뽑아 칼로 정성스레 썬다. 날씨 좋은 날 앉아서 커피 한잔 하면 딱 좋은 평상이 옥상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휴식을 위한 명당자리이다. 그 자리를 정성스레 썰린 무에게 내어준다. 일주일 후 잘 말려진 녀석들을 걷어서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간다. 무말랭이로 만들어 온 가족이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모든 풍경이 나를 옥상으로 부지런히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든다. 열심히 계단을 오르는 발길에는 피부관리실의 손님들도 포함되어 있다. 관리를 받고 반들반들해진 얼굴로 미소를 옅게 띠며 내게 묻는다.
“원장님, 저 오늘 상추랑 고추 조금 얻어 가도 될까요? 저녁에 고기 먹을 건데 딱 상추랑 고추만 없어요. 마트 가기도 귀찮고.”
십이 년째 나의 수요일 오후 3시를 확보하고 계시는 손님이다. 지난주는 가지 두 개를 줄기에서 잘라 가방에 넣어 챙겨 가셨다. 지지난 주는 아마 오이를 가져간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월요일 오전에 오는 손님도 마트 대신 우리 집 텃밭 무료 채소 코너를 이용하신다. 어떤 손님은 내가 아무리 채소를 마음껏 가지고 가라고 말씀드려도 항상 마다하신다. 대신 발걸음을 옥상으로 옮겨 보라색 도라지 꽃과 코스모스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가신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신다.
다른 바쁘신 분들은 옥상으로 발걸음은 못 옮기지만 항상 밭의 안부를 묻는다. 그러고는 “원장님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월세도 안 나가. 세입자들 월세도 들어와. 게다가 멋진 텃밭까지 있어. 내 아는 몇몇 사람들은 텃밭 있는 전원주택이 있기는 하지만, 거기는 월세는 안 나오잖아요.” 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럴 때면 자식 칭찬을 들은 것 마냥 기쁘고 뿌듯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다음에 꼭 올라가셔서 이것저것 드실 것 챙겨가세요. 제가 여러분들과 나눠 먹으려고 뭐라도 하나 더 심으려고 연구합니다.”
건너 건너 들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시기 질투하는 어떤 동네 아줌마가 그랬다고 한다.
“그 피부숍 원장님 말이야, 마트에서 얼마 안 하는 채소로 더럽게 생색낸다더라.”
아마 잦은 취소로 내 고객 명단에서 퇴출된 사람이거나, 대기만 몇 년 하다 결국 자리가 나지 않아 못 들어온 예비 고객 님들 중 한 분 일 것이다.
생색?
나는 내 일에 관해서는 확실히 생색을 내는 사람이다. 고객들의 림프순환을 도와주어 효과를 보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 더 이상 내 피부관리실에는 새로운 고객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데도 내 실력이 뛰어남을 전달한다. 많은 사람들이 꼭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내 관리실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을 찾아서 관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이 들어 모두가 건강하면 얼마나 세상이 아름답겠는가?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귀에는 생색으로 들리겠지만, 상관없었다.
하지만, 채소는 아름다운 자연의 결과물이다. 고맙고 위대한 우리의 식량이다. 한낱 인간이 뭐라고 음식을 좀 나누었다고 생각을 낸단 말인가? 그 채소로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 나는 요리 정도 했을 때나 생색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저 고객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나처럼 농촌 출신이다. 도시에 나와 자수성가해서 중년이 되어서야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를 누리실 수 있게 되었다. 여유를 누리는 방법 중 하나가 내 피부관리실의 서비스이다. 내 공간에 오셔서 나와 시간을 보내주시는 고마움에 표시이다. 그저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다. 단순히 먹을거리를 내주는 게 아니다. 그녀들의 어린 시절 농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조금 더 즐겁게 공간을 체험해 보시라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채소 한 포기, 꽃 한 송이라도 더 심으려고 애쓴다.
옥상에서 멀리 내다보면 서쪽으로는 천성산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대운산이 보인다. 너무 덥거나 춥지만 않은 날 가족들이 모이면 종종 야외 캠핑장으로 변신한다. 한쪽에 텐트를 치고 다 큰 어른들이 모여 하늘의 별을 세는 여유도 즐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밤하늘의 별을 볼 때면 아름다움에 취하고 감정에 젖는다. 곧 옛날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 돌아온 남편 이야기, 사업 초창기 사람들의 배신, 크고 작은 우여곡절 등을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은 쏜 살처럼 흐른다.
가족들 하나 둘 하품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나는 먹다 남은 음식들을 정리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도와주겠다고 일어나는 아들과 예비 며느리들을 다시 눕히는데 실랑이를 몇 번 한다. 매번 내가 이긴다. 내 새끼들이 내 건물 옥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조금이라도 더 보는 게 나에게 더 효도하는 거다. 고기 구울 때 사용한 숯불과 노릇하게 구워졌다 식어버린 한두 점의 고기를 치운다. 고기 먹기 전 텃밭에서 바로 뜯어 접시 위에 올려진 상추와 고추부터 치운다. 손이 커서 매번 넉넉하게 담는 탓에 항상 남는다. 남은 것들은 모아서 다시 씻어 냉장고에 넣는다.
가끔 아파트 생활하는 지인들이나 아들 친구들에게 내 공간에 와서 마음껏 쓰게 해 준다. 아들과 친구들이 잘 쓰고 나면 "엄마, 선물 고마워."라며 이쁜 말을 들려준다. 우리 집 옥상 텃밭은 감사함과 사랑이 가득한 모임 장소가 되었다.
친구들이 “이 정도면 너는 정말 성공한 인생이야.”라고 말해 줄 때, 그녀들은 아마 나의 안정적인 수입과 건물주라는 타이틀을 뜻할 것이다. 나는 내 성공의 상징으로 우리 집 텃밭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파란 향기로운 채소와 꽃들을 떠올리며 친구들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맞아. 나 정말 성공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