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는 연고를 기다리며

by 박희정


시간이라는 연고를 기다리며


아주 크게 마음을 베인 사람에게 타인의 위로는 과연 살에 닿는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 서면 언어는 길을 잃는다.

상처의 깊이는 저마다의 지층이 달라 가늠할 수 없고, 타인의 아픔에 완벽하게 포개어질 수 있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릴 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필름의 한 장면처럼 박혀 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해 질 녘 동네 골목,

한 할머니가 젊은 여인의 팔을 붙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할머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은 거칠고 투박했다.

달콤한 위로라기보다는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날 선 언어들이었다.

그러나 젊은 여인은 그 거친 손길을 뿌리치는 대신, 할머니의 품에 몸을 누인 채 함께 울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할머니의 언어에는 삶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낸 사람만이 풍기는 ‘동병상련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는 것을.

할머니가 던진 투박한 말들은 세련된 문법이 아니라, 같은 지옥을 통과해 본 자만이 보낼 수 있는 생존의 신호였다.

여인은 그 거친 음성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따뜻한 공감을 발견했을 것이다.


누군가 할머니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정교한 심리 치료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더라도

그만큼의 울림을 줄 수 있었을까.


몸속에 고통의 무늬가 새겨지지 않은 매끄러운 언어는,

상처 입은 이의 닫힌 마음을 넘지 못하고 튕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살아보지 않고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말들이 있다.

딱 그만큼의 삶을 통과한 사람만이 꺼낼 수 있는 한정된 언어가 있다.

그것은 화려한 조언이 아니라,

“나도 여기까지 가까스로 살아남아 있다”는 동행 선언이다.


물론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전문가의 정교한 처방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함께 삶의 굴곡을 넘어온 이웃의 거친 한마디가 덧난 마음을 씻어내기도 한다.

그 투박한 말속에 서로의 시간이 겹쳐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다.

만약 신이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것은 아마 ‘시간’이라는 이름의 약일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아픔에 서둘러 마침표를 찍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가 아직 울고 있다면,

그것은 흉터 위에 시간이라는 연고가 스며드는 중이기 때문이다.

말없이 곁을 지키는 것,

섣부른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 것.

그 기다림의 시간이 함께해 준다면 사람은

아주 느린 속도로라도 다시 자신만의 삶의 박자를 되찾기 마련이다.


결국 위로란 대단한 문장을 발굴해 내는 재능이 아니다.

그가 스스로 다시 무릎을 세우고 걸어갈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시계 옆에서 기꺼이 나의 시계를 멈추고 기다려 주는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시간너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