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의 종말, 기계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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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 입구에 서면,
환영하는 인사 대신 낯선 문구 하나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간절한 문구가 붙은 자리에는 이제 사람이 없다.
한때 “어서 오세요”라는 생기 있는 목소리가 머물던 자리에는, 표정 없는 키오스크가 비석처럼 서 있다.
주문도, 상담도, 이제는 인공지능이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문명의 발달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관계의 피로가 낳은 도피라고 부르고 싶다.
기계가 사람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기술이 뛰어나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타인의 무례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하고,
쏟아지는 감정의 오물을 묵묵히 받아내야 하는 직업적 숙명.
그 상처를 오래 견디다 못한 이들이 하나둘 그 자리를 떠났고, 결국 상처받지 않는 강철의 기계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나 역시 ‘응대’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다.
예전에는 여유가 있어 기꺼이 도와주던 일들을, 이제는 달라진 여건 탓에 거절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돌아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비난이다.
“예전엔 해줬잖아요.”
그 한마디 속에는, 나의 호의를 이미 자신의 권리로 편입시켜 버린 이기심이 있다.
길거리 과일 장수의 삶도 이와 닮아 있다.
상처 난 과일 하나를 덤으로 얹어주면 처음엔 고마워하지만, 두 번째는 기대가 되고, 세 번째에 주지 않으면 서운함이 된다.
서비스로 시작된 친절은 어느새 유통기한이 정해진 채무처럼 변한다.
결국 사람들은 친절하기를 조심하게 된다.
다음에도 같은 온도로 건네지 못할 바에야,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나중의 타박을 피하기 위해 지금의 온기를 접는 선택.
그렇게 서로에게 조금씩 차가워진다.
서빙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상담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사라진다.
그 자리에는 말도 없고 웃지도 않지만, 결코 상처받지도 않는 기계가 앉아 있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지는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를 흐르던 온기였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걸어가고 있다.
키오스크의 매끄러운 화면 위로 손가락을 튕기며 문득 생각한다.
우리가 보호하려 했던 ‘가족’들은
정작 누구의 온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기계의 시대는 오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계절은, 이렇게 식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