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등에 새겨진 일주도로]
검정 고무신, 그 시간의 흔적
검정 고무신이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물결이 닿기 전, 길은 온통 투박한 흙길이었다. 비가 내리면 길은 제 몸을 녹여 물길을 냈고, 비가 그친 뒤엔 눅눅하고 질척이는 뻘밭으로 변했다.
그 길 위에서 고무신은 야속하게도 발을 따돌리기 일쑤였다. 붉은 황토 진흙 속에 뭉텅 박힌 발을 빼내어 온전히 나아가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운 좋게 디딤돌을 찾아 건너뛰면 무사히 지날 수도 있었지만, 거칠게 뛰어노는 사내아이들의 신발은 늘 진흙뻘의 포로가 되곤 했다.
내 어린 시절, 시골 아이들의 발끝엔 늘 고무신이 걸려 있었다.
겨울엔 두툼한 양말을 껴 신었으나, 봄바람이 불면 맨발을 밀어 넣었다. 특별히 치장할 것도 없었지만, 딱히 흉될 것도 없는 시골 아이들의 정직한 차림새였다.
초봄, 갓 양말을 벗어던진 아이들의 발등은 도시 아이들처럼 하랬다.
그러나 계절이 깊어질수록 발등 위엔 고무신이 가려준 기묘한 경계가 생겨났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일주도로처럼 선명하게 둘러진 그 띠는, 햇볕이 뜨거워질수록 짙어지는 자연의 인장(印章)이었다.
검정 고무신은 때로 만능이었다.
비가 오면 출렁이는 '배'가 되었고, 마른 길 위에선 거침없는 '자동차'가 되었다. 날개를 떼어낸 벌을 가두면 붕붕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풍차'로 변신하기도 했다. 매 순간 아이들의 상상력에 맞춰 몸을 바꿨지만, 결국엔 다시 주인의 발을 감싸 안는 가장 충직한 단짝으로 돌아왔다.
이제 고무신은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고무신 테두리가 남긴 발등의 자국처럼, 세월은 우리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자취를 남겼다. 검정 고무신. 그것은 유년의 흙내음이자, 여전히 우리 안의 순수를 찾아가는 시간의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