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재배하기로 했다

by 박희정

중년이라 하기엔 사회적 소임이 잦아들고,

노년이라 하기엔 여전히 생의 파도를 받아내야 할 서툰 나이다.

삶의 역할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 결국 남은 길은 노년이라는 이름의 황혼일 것이다.


젊은 시절, 시골 장터에서 마주친 노인들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제 가야 할 곳은 한 곳뿐이지.”

그 말속엔 침전된 체념이 묻어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일까.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원하는 결대로 살아가는 것이 그토록 요원한 일일까. 어차피 떠날 길이라면,

그전까지 삶의 의미를 단 한 뼘이라도 더 늘려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들이 손을 놓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흙을 만지고 땀 흐리며 노동하며 산다.

그러나 그것은 해 오던 대로 하는 습관적 노동이 되었다.

노년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너무도 쓸쓸한 일이다.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오직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는 법만을 정답처럼 외우며 달려왔을 뿐이다.

그래서 퇴직은 곧 우울이 되고, 아이들의 출가는 공허의 구멍을 남긴다. 나를 키우는 법, 나를 사랑하는 법, 스스로 행복해지는 기술은 애초에 배우지 못한 과목이었다. 일이 사라지면 삶도 멈추는 줄 안다.

퇴직 후의 하루는 지루하게 늘어지고, 자식이 떠난 빈집은 적막보다 길다.


나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꿈을 꾸기로 했다.

일상의 소소한 조각들과 화해하고 싶다.

여백이 생긴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고 피리를 불며 유희를 즐기고 싶다. 책장을 넘기고 글을 쓰며, 사유의 깊이가 주는 알싸한 맛을 음미하고 싶다. 모든 순간이 타인이 아닌, '나'를 향해 흐르는 삶을 살고 싶다.

한때는 치열하게 살면 언젠가 보상처럼 행복이 찾아올 거라 믿었다. 그러나 행복은 배달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재배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영원히 없다는 것을.

붓 끝의 감촉, 산책길의 공기, 책장 넘기는 소리. 그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나의 행복이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지나간 젊음을 복기하거나, 이루지 못한 꿈을 복기하며 아쉬워하지 않으려 한다.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케이트보드처럼 몸으로 부딪히는 꿈들은 육체의 한계에 부딪혀 멀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살아갈 이유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행복의 조건을 새로 고치기로 했다.

먼 곳을 기웃거리며 행복을 구걸하지 않겠다.

떠나야 할 것은 기꺼이 보내고, 다가오는 것은 환대하며 맞이할 것이다.

나는 비로소, 행복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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