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국 한 그릇

by 박희정


된장국 한 그릇, 그 속에 깃든 '게미'


내일은 비 소식이 있다더니, 오늘은 유난히 지열이 높다. 눅눅한 더위에 입맛마저 달아난 오후. 이럴 때 생각나는 건 화려한 성찬이 아니라, 잘 끓여낸 된장국 한 그릇이다.

어릴 적 시골 살림은 늘 계절을 앞질러 바빴다.

이맘때면 논매랴 밭매랴 눈코 뜰 새 없던 어른들의 뒷모습이 선하다.

요즘이야 기계와 약이 좋아져 예전만큼의 고단함은 덜해 보이지만, 그 시절 어머니들의 손길은 농사일보다 몇 곱절은 더 분주했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어머니들은 부엌에 들어서기만 하면 뚝딱, 상을 차려냈다. 투박한 손으로 조물조물 무쳐낸 나물이며, 텃밭에서 갓 딴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은 된장국.

거기에 칼칼한 고추 몇 개를 툭툭 썰어 넣으면 온 집안에 구수한 내음이 진동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도, 상 위에는 늘 '진짜 맛'이 서려 있었다.

누군가 맛을 물으면 대답은 늘 간결했다.

“아따, 맛나네.”

어쩌다 귀한 음식이라도 마주하면 터져 나오는 감탄사.

“오매, 맛나븐 거!”

수식어 하나 없어도 그 말속엔 맛에 대한 경외와 만족이 꽉 차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미사여구가 참으로 무성하다.

“얼큰하고 시원하며, 담백한 맛이 끝내줍니다.”

“기름기를 쫙 빼서 돼지 특유의 잡내도 없고, 담백하니 맛있네요.”

말끝마다 '담백' 타령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담백한 맛'이란 참으로 애매한 구석이 있다. 애미 맛도 애비 맛도 아닌, 특별한 개성 없이 밍밍한 상태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말은 아닐까.


본래 맛의 기본은 신맛, 단맛, 짠맛, 쓴맛, 매운맛의 오미(五味)라 한다.

이 중 한 가지라도 제대로 가릴 줄 알아야 간을 볼 줄 안다고 했다.

하지만 진정한 식객이라면 오미를 넘어선 또 하나의 맛을 알아야 한다.

전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게미’**라고 부른다.

어른들이 음식을 드시다 넌지시 던지는 말씀이 있다.

“그 집 음식은 참 게미가 있어.”

'게미'는 오미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단순한 맛의 합이 아니다. 그것은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맛이자, 목을 넘긴 뒤에도 입안에 남는 은근한 여운이다.


갓 시집온 새색시의 음식은 색감과 모양이 형형색색 곱다. 하지만 맛을 보면 어딘가 허전하다.

혀로 느끼는 맛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반면 평생을 솥단지 앞에 서 온 어머니들의 손맛은 다르다. 투박하게 조물조물 무쳐낸 나물 한 접시에도 깊은 울림이 있다.

그것은 솜씨의 영역이 아니라 세월의 영역이다.

시간이 삭히고 정성이 다져 만든 그 깊고 오묘한 맛, 그것을 ‘게미’라 부르고 ‘어머니의 맛’이라 읽는다. 여름날 그리운 것은 바로 그 게미 있는 된장국 한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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