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안에 대하여

by 박희정

지평선 너머를 걷는 눈 천리안


경험은 영리라고 했다.

지혜의 가장 정직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생이라는 좁다란 골목을 누비며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을 통해 영리함을 배운다.

그러나 아무리 기민한 자라 할지라도 찰나의 사는 동안 세상의 모든 파도를 직접 맞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은 유한하고,

머무는 시간은 턱없이 짧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가보지 않은 길의 굽이를 읽어내고, 겪어보지 않은 풍랑의 높이를 짐작한다.


세상은 앉아서 천 리를 보고

서서 만 리를 꿰뚫는 그들을 향해 ‘천리안(千里眼)’을 가졌노라 추앙한다. 하지만 그 신비로운 이름의 실체를 파헤쳐 보면,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지면에 발을 딛고 선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다.


그들의 망막이 남들보다 예리하거나 수정체가 투명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남들이 무심코 흘려보낸 찰나를 붙잡아 더 깊이 사유하고, 흩어진 세상의 파편들을 더 치밀하게 연결하며, 그 연결의 고리를 끊임없이 벼려냈을 뿐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인푸제 성향이라던가,


가보지 않은 곳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짐작의 밀도’를 극대화하여 빚어낸 거대한 재구성이다.


천리안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벽돌은 과학적 추론이다. 세상은 무질서한 듯 보이나 철저한 인과(因果)의 사슬로 묶여 있다. 잎사귀 하나가 흔들릴 때 그것이 바람의 장난인지, 숲짐승의 기척인지를 가려내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며, 오늘의 작은 징조는 반드시 내일의 거대한 사건으로 이어진다는 논리적 확신이 천리안의 뼈대를 이룬다.


그 뼈대 위에 살을 붙이는 것은 인문적 상상이다.

숫자의 세계에 온기는 없으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맥락이 있다.

타인의 고통과 시대의 흐름을 나의 감각으로 치환하여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떠했을까”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공감의 힘이다.

이 상상력이 더해질 때, 딱딱하게 굳어 있던 정보들은 비로소 숨을 쉬며 ‘미래의 형상’으로 피어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은 예민해진 오감과 육감이다.

논리와 상상이 채우지 못한 미세한 빈틈을 메우는 것은, 공기 중에 떠도는 긴장감을 포착하는 예민한 안테나다.

보이지 않는 주파수에 나의 감각을 밀착시킬 때, 사유는 추론을 넘어 확신이라는 도약에 이른다.

그렇게 사유하고, 연결 지어 보는 세상이 곧 천리안의 세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천 리 밖의 풍경은 더 이상 막연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손바닥 위의 무늬처럼 선명하고, 발끝에 닿는 흙의 감촉처럼 실재한다.


결국 천리안이 되는 법이란, 특별한 신통력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 앞에 내 정신을 집중하는 일이다.

지평선 너머를 보고 싶다면 눈을 크게 뜰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보폭을 넓혀야 한다.

깊이 고뇌하고 뜨겁게 연결하는 자에게, 세상은 숨겨두었던 제 뒷모습을 기꺼이 내보여 주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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