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 한 접시에 실린 '심'과 '정'
날이 더우면 만물이 물을 잔뜩 머금는다.
초목은 그 푸르름을 더해가고, 사람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생기가 돈다. 단순히 조후(燥候)의 영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에너지가 분출하니, 사람도 나무처럼 제 나름의 꽃을 피우고 예뻐지는 법이다. 물론, 너무 더우면 곁에 있는 사람조차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해 직장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음, 나야.”
“왜애?” 아내의 목소리에 바쁨이 묻어난다.
“저녁에 이뻐해 줄게. 오는 길에 장어 좀 사 올래?”
“하이고,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아니, 내가 요즘 ‘심(힘)’이 없당께. 나 오늘 심 좀 써볼라니까, 장어 꼭 사 와잉!”
“시끄러워어, 심 안 써도 돼!”
매몰찬 대답이 돌아온다. 이놈의 여편네(?)는 서방이 먹고 싶다는데 단칼에 내동댕이를 친다.
서운한 마음에 ‘에라이, 어디 가서 시원한 생맥주나 한잔할까’ 공상만 하다 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들어온 아내의 손에는 묵직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말은 무심하게 했어도 남편의 허한 속이 내심 걸렸던 모양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장어를 안주 삼아 소주 한 잔을 곁들이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그런데 분위기를 좀 잡아볼까 싶으면, 눈치 없는 아이들이 이 방 저 방 배회하다 급기야 안방까지 점령한다. ‘저 녀석들이 때 되면 제 방으로 가겠지….’ 기다림은 길었고, 내 눈꺼풀은 그보다 무거웠다.
어라, 눈을 뜨니 아침이다.
장어의 효능을 시험해 볼 기회도 없이 허망하게 밤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출근길, 나를 배웅하던 아내가 슬쩍 웃으며 묻는다.
“여보, 오늘 저녁에도 장어 사줄까?”
나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버려 둬. 먹어도 심(힘)도 못 쓰는데 뭘….”
“ㅎㅎㅎ”
아내의 웃음소리가 아침 공기에 경쾌하게 퍼진다. 장어 한 접시에 사랑도 확인하고 웃음도 챙겼으니, 이만하면 ‘심’ 좀 못 썼어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싶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