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은 쉬워도 사유는 어렵다⸻

by 박희정


— 스피노자와 니체를 지나, 내 생각에 닿기까지


가끔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세상에는 스피노자와 니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만 같다.

관계를 말할 때는 니체를, 감정을 이야기할 때는 스피노자를 약초처럼 꺼내 든다.

말끝마다 철학자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정작 그 자리에 없는 고인들만 유독 분주해진다.


그들이 위대한 사상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나 역시 그들의 문장을 읽으며 여러 번 감탄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깊은 사유의 바닥에 닿았을까 싶어 숙연해진 적도 많다.

하지만 감탄과는 별개로,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저 말은 지금도 정말 맞는 말일까.

철학자는 위대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무오 할 수는 없다.


스피노자는 17세기를 살았고, 니체는 19세기를 살았다.

그들의 사유가 아무리 깊었다 한들, 그것은 자기 시대의 바닥을 향한 깊이였지, 오늘의 세계를 끝까지 내다본 높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깊이는 존경할 만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절대성으로 곧장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넓은 세상을 보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의 성과를 누린다.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옛사람들이 평생을 걸쳐도 닿기 어려웠던 정보의 문이 열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우리는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 누군가의 문장을 빌려오는 데 더 익숙하다.

아마 인용은 쉽고 사유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문장을 가져오면 일단 안전하다.

내 생각이 다소 허술해도 철학자의 이름이 그것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래서 철학자의 이름은 사유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종 생각의 권위로 소비된다.


그러나 철학은 권위를 빌리는 일이 아니라, 권위마저 의심하는 일에 가깝다.

“누가 말했다”를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정말 그러한가”를 끝까지 묻는 태도.


어쩌면 철학은 그 한 문장으로 요약될지도 모른다.


니체가 기존의 도덕을 의심하라 했다면, 그 문장을 멋지게 읊기 전에 내가 붙들고 있는 위선과 체면부터 먼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스피노자가 감정은 이해의 대상이라 했다면, 정작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그 말이 내 삶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스스로 살아내 보아야 한다.


말은 누구나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자기 안에서 시험해 보는 일은, 누구에게도 대신 맡길 수 없다.

인류는 발전했고 정보는 넘쳐난다.

옛사람들이 평생을 걸쳐도 닿지 못했을 지식을 너무 쉽게 훑어본다.

그런데도 사람이 그만큼 깊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는 것은 많아졌는데 생각은 짧아졌고,

정보는 넘치는데 숙성은 부족하다.

질문이 떠올라도 답보다 스마트폰 알림이 먼저 도착하는,

너무 쉽게 흩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말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경전처럼 받들 필요는 없다.

존경하되 숭배하지 말고,

인용하되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


스피노자를 읽었다면 스피노자에서 멈추지 말아야 하고,

니체를 빌려 멋을 부리기보다 니체를 지나 내 생각에 도착해야 한다.

위대한 문장이 낡지 않는 이유는 말한 사람의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다시 살아보는 사람의 태도에 있다.


멋진 철학자의 문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묻게 된다.

“그래서, 그 말은 지금 당신의 삶에서도 맞습니까?”

그 질문 앞에서 머뭇거린다면,

그것은 아직 철학이 아니라 인용일 뿐이다.


남의 문장을 빌리는 일은 쉽다.

그러나 자기 삶으로 증명하는 일은, 끝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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