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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Aug 12. 2022

조용현 저,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를 읽고

저자는 책을 만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의 개인적 기원은 폴 버호벤 감독,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토탈리콜’을 보고 나서였다.

 책은 크게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는 인식론에서 존재론에 걸쳐있다. 2부는 형이상학적 물음 가운데 특히 영혼의 문제를 다룬다. 3부는 우리의 삶을 다룬다. 이런 철학적 접근을 SF영화를 활용한 방식으로 접근했다.라는데 의미가 있다.”     


책 내용 소개     

1부 가상, 현실, 그리고 세계

 1장 보이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향수”, “디 아이”


사람은 시각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서두에서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알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증거로써 감각의 애호를 들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애호하는 것은 눈의 의한 것(즉 시각)이다. 그 이유는 본다는 것은 어떤 다른 감각보다도 우리들에게 사물을 가장 잘 인지할 수 있게 하고 그 각종의 차이를 명확히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에는 이것이 무엇으로 보이는가? 소녀의 뒷모습으로 보이는가? 그러나 또 다르게 보면 아름다운 소녀는 사라지고 늙고 추한 노파의 옆모습이 보인다. 망막에 맺히는 상은 같지만 보이는 것은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소녀와 노파 외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두 가지로 보이는 것은 우리 뇌 속 에 소녀와 노파의 모형이 들어있고 그 모형을 이 상에 맞추어 봄으로써 “이것은 소녀다” “이것은 노파다”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진짜 존재하는가? “토탈리콜”, “공각 기동대”     


19세기에 오면서 과학과 철학은 뚜렷이 구분되는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철학의 중요한 문제들은 과학의 과업으로 이전되어 갔으며 20세기 들어와서 이 과정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비경험적 영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한 헛소리로 치부되었으며 그 결과 철학은 사실에 대해 발언할 기회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신경접속형 가상현실에서 감각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실 감각의 차원에서 볼 때 둘은 동일한 것이다.     


사물은 지각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각하기를 그치는 순간 존재는 사라진다.'라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이 세계는 나의 지각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유아론(solipsism)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현실과 가상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내가 나를 모니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의식’이며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음은 동일한 감각 자료라도 현실의 사과와 가상현실 속의 사과를 구분한다. 그러나 그 구분에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통속의 뇌[오픈 유어 아이즈, 위험한 게임]


주관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라면 그것은 가상이다. 주관과 관계없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현실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유일한 통로가 우리들의 지각 밖에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모든 꿈은 어떤 것의 현실이고, 모든 현실은 어떤 것의 꿈이다. 데카르트의 ‘정신’이다. 정신이 본질은 사유이고, 이것은 우리의 물리적 세계의 본성을 구성하는 연장과는 다르다. 그것은 연장이 아니므로 시간과 공간 속에 규정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세계 ‘밖’에 있다. 정신이라 불리든 신이라 불리든 어떤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것이 특별히 현실이라는 존재론적 신분을 갖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현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상이다. 이 경우 세계 밖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이 논리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다.     

“어느 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펄 나는 것이 확실히 나비였다. 스스로 유쾌하여 자기가 장주인 줄을 몰랐다. 그러나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자기는 틀림없이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가?     


가상의 너머[매트릭스]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전자는 ‘없는 것’이고 후자는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깨끗히'는 틀린 단어가 아니다. 이것을 대상언어로 보면 맞춤법이 틀렸지만 메타언어로 보면 틀린 것이 아니다. 메타언어는 맞춤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컴퓨터는 대상언어(깨끗이)와 메타언어(깨끗히)를 구분하지 못한다. 언어에 대한 언어를 메타언어라고 한다.   

  

초월과 내재 [토탈리콜]과 [메트릭스]     


신, 인간, 그리고 영혼     

왜 우리는 신을 찾는가?[스타트렉1-모션 픽쳐]     

화가가 진정으로 찾고 있는 것은 대상세계의 표현을 매개로 한 자기인식이다. 자기인식에 공여할 수 있는 작품만이 진정한 예술작품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바로 외부로 표현된 그 자신의 대상화-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자각해 가듯이 신이 자신의 창조물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     

만물의 목적은 자기실현이다. 이것은 신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최고의 자기실현은 자기인식이다.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바깥으로 드러냄으로써 대자화해야 한다. 이 외화의 과정이 바로 창조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신이 자신을 알기위한 필요조건이다. 창조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보듯이 그 넘쳐나는 선함에서 오는 은총으로서, 신이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옵션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본성에 속한다. 창조 없이는 신도 없다.


150억 년의 물질, 생명, 정신의 진화는 신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하면서 자기 자신에 도달해 간다는 헤겔의 도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조적 천재들의 보편적 느낌이 바로 이러할 것이며, “인간은 세계를 아는 만큼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세계를 아는 것은 오직 자기 내에서이고 자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계 내에서이다”라는 괴테의 통찰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악마의 자손인가? [유년기의 끝, 신세기 에반게리온-일본 에니메이션]

사후세계는 있는가? ; 체외이탈과 임사체험 [유혹의 선]     

우리의 마음 또는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한 현상인가 아니면 뇌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인가? 만일 전자라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우리들의 마음도 소멸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을 ‘유물론(materialsm)’ 또는 ‘부대현상론(ephiphenomenalism)’라고 부른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부정한다. 반면 우리의 마음은 육체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라고 주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심신 이원론(dualism)'라고 부르는데 그 대표적 철학자가 데카르트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죽음 후에도 마음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대체로 이 부류의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믿는다.    

 

나, 너 그리고 삶     

우리의 의식은 죽음이 바로 자아의 소멸을 가져온다는 것을 좀체 납득하기 어렵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죽음은 우리의 의식에 의해서 대상화되고 우리는 죽음 바깥에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죽음 너머로 영속하는 듯한 확신을 준다. 일반적으로 말해 소외된 인간 그것이 바로 귀신이다. 우리는 귀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 ‘관계’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적 존재는 다른 의식적 존재를 통해서 비로소 존립근거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승인과 인정은 필수적이다. 이처럼 귀신은 그 시대의 소외의 반영이다.      


응징이 도덕 행위를 강요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반대로 응징이 주어지지 않으면 배반은 쉽게 일어난다. 도덕행위의 본질은 그 응징 가능성에 있다. 이 응징이 사실 정의의 원초적 의미다. “착하고, 강인하고, 관대하며, 투명하다.”이것이 정의의 기본적 특성이다. 협동과 신뢰는 응징가능성 위에 성립한다.


책을 읽고 나서

첫 번째 대출에서 시간에 쫓겨 반쯤 읽다 반납하고 다시 빌려다 읽으면서 느낌이 떨어졌지만,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라는 관점에서 저자는 영화와 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철학을 비롯해서 다양한 학문을 접한 저자는 조선일보 칼럼 연재도 한 박식가다. 난해하지만 “인생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책 소개     


보이는 세계는 진짜일까? 조용현 저, 우물이 있는 집, 2006. 2. 15. 13,000원.


조용현 - 부산대졸, 같은 대학원 철학과에서 [포퍼에 있어서 과학적 지식의 성격과 그 인식론적 기초,1991]라는 논문으로 학위 받음. 미 버클리대, 포항공대 과학문화센터 객원연구원, 현재 인제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저서 ‘칼 포퍼의 과학철학’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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